[1113 수정]눈이 녹는 법 없이 쌓인다면?
오렌지
2024-11-03 20:19
전체공개
학살이 있었던 시기를 생생하게 감지하기에 나는 조금 젊다. 거기에 서울과 수도권 언저리에 머물러 살아 온 나의 현대사 인식은 글이나 사진을 통한 간접 교육으로 형성되어 매우 얄팍하다. 서울은 자꾸 예전의 흔적을 지워내며 움직이는 도시이다. 1년 내내, 하루 종일 밀물만이 달려 들어오는 공간에서 사는 기분을 준다. 이 곳에서 나는 과도한 인구밀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애써 회피하듯 당장 눈 앞의 소식과 내 일만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취급하게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자꾸만 안 가본 곳을 다녔다. 여행으로 가기도 하고, 살러 가기도 하고, 일해야 해서 머무르기도 했다. 컨텐츠 화 시킬 만한 체계적이고 풍성한 경험까지 안 되더라도, 발로 걷고 눈으로 보고, 대화를 해서 느끼는 모험의 감상은 소프트웨어보단 하드웨어로 형성되는 것 같은 점이 기록을 통한 배움과의 차이점이었다. 생각의 틀이 가진 질감과 크기와 모양 같은 것이 자꾸 변화했다. 그리고 틀이 안에 들어있던 데이터의 모양과 성질을 찰랑거리도록 흔들었다.
지리가 있고 풍경이 있다. 풍경은 삶을 담아 마지막에는 땅에 녹는다. 그래서 사람의 모든 기억들은 그 때의 계절, 식생과 함께 한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풍경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겨울이라는 확실한 계절과, 결정 틈으로 소리를 흡수해 땅으로 내리던 조용한 눈과, 눈이 닿으려던 땅 위에 가득히 쌓여 있던 얼굴들의 환영이었다. 찬 얼굴이 잇고 있는 따뜻한 피를 가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뻗었던 손과 같은 이미지가 내 안의 개인사의 기억들과 연결되어 감정으로 치환되 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찬 바다에 가기로 결정했고 풍경을 목도하자 지나간 일들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 친구가 있었다. 채도가 낮은 유화를 잘 그리던 친구였는데 식물이나 자연물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나는 10여년 전 그 친구와 바다에 놀러 갔다. 하얗게 잘잘히 깔린 모래에 부대껴오는 파도를 향해 친구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아, 용량 별로 안 남았다며! 그걸 다 파도 사진으로 채우면 어떻게 해!"
"그런가?"
친구는 머쓱하게 웃었지만 파도 사진 찍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나는 친구에게 핀잔을 줬다. 그만 해~, 용량 아깝게, 내 눈에는 매번 다르게 생기긴 했지만 다 비슷한 파도였다. 구름이 살짝 낀 흐린 날의 가을이라 쓸쓸한 감상을 준 바다 정도였다. 우리는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지만,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성정을 가진 친구에게는 바닷물의 일렁임 하나하나가 나와 다른 순간으로 보였던 것 같다.
오늘에 이르러 나는 뒤늦은 감수성으로 친구의 심상을 이해했다. 멈추지 않는 파도 하나하나가 마음을 집어 삼켜 밀려 들어오던 하루를 보내고 나서였다. KTX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래사장에 이어진 동해바다는 특히 넓고 깊고 파랗고, 물살이 거세고 무서웠다. 한참을 파도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하늘을 보려고 고개를 들고서 나는 숨을 헉 하고 삼키며 놀랐다. 시야를 막는 건물이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하늘이 넓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평소에 보던 하늘은 동굴 입구에 들어오는 한 줄 빛 같은 작은 창이었다는 걸. 나의 옛 친구가 차마 눈을 못 떼고 주저앉아 사랑한 풍경이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 내가 10년이 걸쳐 닿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과거는 언제든 떠올릴 수 밖에 없기에 모든 사건과 인연은 완벽하게 헤어질 수 없으며, 징검다리처럼 만남의 기쁨 사이에 아쉬움이 자리하는 미결이다. 사는 동안 쌓여만 가는 답보 상태들을 '언젠가'라는 미래로 이동시키는 말 한 마디가 책의 제목 같았다. 사력을 다하는 말이란 특이하게도 길게 늘어지는 법이 없다. 바람 부는 제주도의 사투리가 짧은 말에 의미를 담아야 들리는 것 처럼.
표지의 모래사장과 바다, 그리고 멀리서 높이 흔들리는 하얀 천은 압도적이며 의미심장한 인상을 준다. 책을 펼쳐드는 목적은 은유의 답을 찾아내는 추리에도 있곤 한다. 나는 밀려들어오는 파도 가까이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높은 집중력으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늦장 부리는 여름에 잠시 머물다 쫓겨나듯 떠나는 이번 가을에, 곧 다가올 겨울과 흰 눈을 고대하며 이 책을 읽는 시기가 절묘한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일 뿐이지만, 그게 전부인 걸 아무것도 그러쥐지 못하는 손이 안다. 나는 자꾸 빈 손으로 나를 둘러싼 일들의 띄엄띄엄 떨어진 간격을 이으려고 시도한다. 왜 그러냐면 이음을 시도하다 몰랐던 뜻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표지의 흰 장막은 바다 위로 수십 년을 쌓여가던 그 날부터의 눈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의 위로 녹지 못한 눈이 쌓여 그렇게 높고 두꺼웠을 것이다. 나는 가끔 삶 앞에서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당황할 때가 있다. 나를 맴도는 나 자신만의 삶으로 벅차다고 느끼고는 하는데, 그런 작은 나의 일 따위는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세상의 어둠을 누군가가 대신 삼키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하던 걸 멈추고 잠시 멍해진다. 숨을 한숨처럼 크게 내쉬고 들이쉬고 걷게 된다. 시간을 내 생각 없이 스치던 것들을 돌아봐야 할 근거와, 가지런히 덮여 있는 다른 모르는 책을 펼쳐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길에 심어진 나무 열 그루를 발걸음으로 지나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산 하나를 KTX로 타고 넘는 시간이 나무를 지나치는 시간과 같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영광을 누리고 있고, 너무 많은 큰 일을 저질렀다. 다들 이 충격을 소화하기 위해 길고 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디를 가는 걸까?
빠르고 높은 성과에 집착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현재 일어나는 일이 지난 일의 결말이라 느끼고, 지금을 기점으로 과거의 평가를 내리는 경향성을 가진다. 어떤 일의 잘잘못을 따지기도 한다. 무엇을 미뤄 왔고, 어떤 일은 잘 될만 했다, 이런 식이다. 하지만 어떤 확고한 기준이란 결국 거기에 얽매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를 따진다는 건 현재에 멈추는 일이 된다. 보다 나은 방법을 찾으려는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고의 폐해는 이미 우리가 공감하는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 때때로 사람은 스스로의 미진함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특히, 시간감각에 붙잡혀 있지 않도록 자신을 쥐고 흔들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한 가장 괜찮은 방법은 이미 기록된 문자를 읽고, 문자의 시간 안에 들어가 자신이 가진 유한함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하는 고립된 섬 제주의 인선의 집에 가서, 다시 추운 날 단수와 정전이라는 극단적인 고립에 처한다. 괴로운 현실 감각을 뒤흔들고자 경하는 새와 인선의 환영을 불러낸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묘사된 순간 있는 것이 확실시 되는 환상의 구역은 효과로는 독자의 시간감각을 뭉그러뜨리는 데에 있다. 유연해지면 고립이라는 경직된 틀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 헤어진 이와 만나고, 못다한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만다.
그래서 소설이라는 타인의 시간을 타고 뒤흔들어진 나는 옛 친구의 시선이라는 과거와 조우하는 한편, 곁에 있던 누군가에게 쓸까 말까 망설이던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일, 집.. 일..집, 운동, 생활, 개인사 챙기기 등으로 바빴던 분기에, 시도 글도 못 쓰고 손을 놓고 어쩐지 지루하다 느끼던 참에 새 시도를 하게 되었다.
한편 책이 가진 역사 기록으로서의 의미와,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세간의 큰 좋은 소식이 섬세하게 모든 감상과 함께 한다. 좋은 일로서 이 책을 누려도 되는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글을 읽고 내용을 곱씹는 것의 의미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아보는 데에도 있으니까. 문장은 차근차근히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밀도 있게 쓰여져 있다. 도리 없이 몇 번이고 슬퍼서 울게 될 만큼.
소중한 것들이 소중한 줄 알고 그렇게 대하는 사람에게조차, 삶은 부질없이 잔혹하다. 잔인한 순간을 내버려두고 시간은 흘렀고, 현재의 삶의 고됨이 가장 잔인했던 순간이 뭉텅 쌓아 놓은 빚을 진 채로 이어진다. 오늘날의 여자들이 옛날의 물동이 인 할머니들처럼 머리 위에 짊어진 건, 모든 일이 다 벌어진 후 마감 역할로서 돌봄의 무게이기도 하다.
소설은 세상에서 당연시 여기고 받아간 여자들의 대를 잇는 돌봄과 슬픔과 우정을 그 사람들의 입을 빌려 구어로 전한다. 여자가 세상의 구성원으로서 진실어린 존재로 사는 모습과, 어떤 역할을 이루고자 했었는지, 사랑이 이들에게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뒷 이야기가 책의 전면에 나올 수 있는 건 아시아 여성이라는 당사자성을 띈 작가에게 가능한 획기적인 설정처럼도 보였다.
경하와 인선처럼, 많은 여자들이 부모와의 마음의 어긋남이나 미지의 부분들을 응어리처럼 이고 살다가, 짓눌려진다 느끼고 거기서 벗어나려 하다가도 늙고 약해진 부모의 곁에 할 수 없이 머물러 그를 다 돌보게 된다. 떠나는 생명에게 생명을 주어 붙들다가 그가 떠나면 픽 하고 탈진해 쓰러진다. 세상에선 결혼만이 여자의 삶을 좌우하는 것처럼 말 하지만, 일이든 육아든 삶의 소명이든, 여자가 하려던 모든 것들이 이 시기에 크게 흔들린 뒤 한 번은 멈춘다.
그리고 바쁘고 힘든 여자들은 꼭 작은 귀여운 동물을 옆에 두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어쩌다 여자들은 감내하다 못해 텅 빈 속에서도 마른 행주 쥐어짜듯 뭘 돌보려고 드는 걸까. 그리고 말라붙어 버린 돌봄의 결말을 세상이 못 본 척을 하는 데까지가 우리가 보통 아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사실은 언젠가 돌봄의 용도로 사용될 내가 두렵다고 말하기가 겁이 나 그 마음을 꽁꽁 숨기는데, 말로 하는 순간 받아들여지긴 커녕 매도당할 까봐 고개를 못 들 때도 있는데, 이 마음을 잘 아는 작가의 서정적인 시선 속에서 쓰여진 글에 묻어진 삶이 드러난다. 가리워진 것들은 워낙 존재가 작아 그런지 모습을 보여도 살풋 조심스럽다. 새의 작은 날갯짓을 떠올리는 성냥의 작은 불처럼, 지친 여자들의 꺼져가는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아직 있는 생명과 같은 묘사처럼. 용기란 거창한 포부여서는 오히려 폼이 나질 않는 듯 하다.
학살하는 사람들은 남자들이다. 어디에선가 다른 남자에게 명령을 받고 나타난 남자들이다. 그를 피해 피투성이가 되어 도망가는 남자들이 있고, 사정없이 여자와 아이를 죽이던 남자들이 있다. 다들 언급하길 꺼려하지만 학살이나 전쟁은 국가나 이념의 폭력이면서 그를 수용하는 남자가 저지르는 폭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남자를 어떻게 인지하거나 대하면 좋을지 고민하게 된다. 여자의 삶에 남자의 파급력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군인들이 시체를 흔적없이 치우려고 사람들을 일부러 바닷가에서 학살하는 사건이 나온다. 그리고 주인공 여자들은 사라진 시체의 위치를 가늠하는 시도처럼 나무를 심으려고 기획하거나, 목수가 되어 이정표로서 나무의 곁에 머무른다. 작별하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시도는 소설로 남기려다 끊임없이 꾸게 되는 경하의 악몽이나 인선의 손가락 절단, 엄마 정심처럼 진실 규명을 위하여 삶을 다 투하하는 여정으로 남기도 한다. 사연 상 그럴 수밖에 없을지 몰라도, 난 어쩌면 지극한 사랑을 위한다며 여자들이 하는 시도들이 스스로를 빈사상태에 이르게 만드는 자해가 되고 만나고도 생각한다. 책임을 각성할 이들이 따로 있는 상황이니 만큼.
인간이 벌이는 각종 소동은 온갖 문제를 끌어다가 담기 마련인데, 실제로 온갖 것이 부서지고 산새때가 날아오르도록 불탈 때는 가장 조용한 일 취급을 받고, 얄궂게도 실제 피로 이어진 소규모 직계의 바운더리에 가서야 묵음을 벗어나려는 시도에 나서곤 한다. 가족의 이야기는 누구나에게 가장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피가 아니면 사건이 사건임을 모르는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따로 하고 싶은 말이 많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책을 읽고 경건해져 혼자 읆조렸던 말들이 무엇이었고,
따뜻한 얼굴을 가지지 못했다면 나의 얼굴 위로 지금까지 얼마나 두꺼운 눈이 쌓였을까요.
그동안 내가 이고 지고 와야 했던 비와 눈과 바람과 짐의 무게는 얼마였으며,
그냥 주어진 행운 덕에, 나는 얼마나 많은 무게를 생명에게서 부여받은 체온으로 당연한 듯 덜면서 걸어 왔던 걸까요.
저는 한 자리에 앉아 기억을 풀어내면서 바다 속의 작은 소용돌이가 되어 주변을 삼키려 들었는데,
하릴없이 바라보게 되는 하늘과 바다에 같은 풍경이 없길래 뱅뱅 돌다가 결국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고 지루하지 않았어요.
진실은 댓가가 없었어요. 풍경도, 사랑도 눈치챌 때 살그머니 와 닿는 물성이었고,
사박하게 밟히는 모래를 살로 느끼고 싶어 몇 번을 신발을 벗고 주저앉아 손에 움켜쥐고 비볐습니다.
마침 따뜻한 손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을 바닷물을 먹은 모래가 차갑다고 알 수 있었어요…
우리 각자가 헤어지고 싶지 않은 타인에게 시도했던 말과 행동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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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3 기한 맞추어 수정 완료!
초안까지 같이 지켜봐 주신 분이 계시다면 영광입니다.
부족한 점 많지만 일단 띄엄띄엄 쏟아냈던 첫 말들의 간극을 이은 심정이 뿌듯하네요.
곧 뵈어요.
댓글
대램져 |
8일 전
독서 중에 많은 것들이 떠오르셨다는 게 느껴져요. 시간을 들이고 고민을 거치셨을 글을 읽게 되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누군가는 심각하게 희생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방황하기도 하면서 다들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기 나름일 것이라고 여기자면, '이 충격을 소화하기 위해 길고 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디를 가는 걸까?' 라고 적으신 문장에 특히나 공감하게 됩니다..
오렌지 |
8일 전
안녕하세요 대램져 님! 댓글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 각자의 고통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은.. 사실 책에서 다룬 큰 사건의 작은 파편들을 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고통의 근원이 어디인가,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성찰의 질문을 영적인 어투로 다루고는 하지만, 실은 마주하기 어려운 큰 사건이 중심에 있고, 그를 알려 들면 다음 순서로서 자기 자신에의 성찰과 도약이 필요하기 때문에... 구태여 자신의 고민에 직면하려 드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희들이 내일 나눌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균열을 내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구조물에 틈이 나면 부서질지, 탈출구가 될지, 흠집이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르지만 계기로는 확실하게 남겠지 싶어요. 생각이 많아 산만한 글이라 조리 있게 또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내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