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2411 시즌 - 책 <작별하지 않는다>
콩보리
2024-11-20 18:28
전체공개


지금도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다.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를 전하는 소식들을 접하면 자동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며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생각한다. 비슷한 패턴으로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폭력과 학살이 있어 왔고 뉴스는 사건과 사망자를 숫자로 보도한다. 건조한 아픔을 잠시 느끼고 무엇도 할 수 없음에 무기력해진다. 때론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면 감정은 조용히 사그라들고 일상에 파묻힌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내게 스쳐 지나간 건조한 아픔의 이야기였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사망자에 이름이 붙여지고 그에게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이 있었다는 생명이 불어넣어지자 더 색색하고 생생한 아픔과 먹먹함이 느껴졌다. 피해자들 뿐만 아니라 가해자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일상에서 만났다면 그들은 어땠을까. 그들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5.18과 4.3 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가해자로 폭행을 저지른 한국 군인들도. 지난날 행한 폭행과 폭력 이후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온전히 살아낼 수 있었을까?   

경하의 이야기를 읽으며 무더웠던 올여름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거실 마룻바닥에 누워 깊은 무기력과 우울을 겪었던 모습. 그래선가 뭔지 모를 위로가 느껴졌었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나의 지난 사년은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 같은 무엇이었을 것이다” 

올 초 마음에 품어오던 일을 경험하기 위해 힘들게 집을 맡기고 떠났다가 몸이 아파 반년 만에 돌아왔는데, 그게 실패처럼 느껴졌다. 산다는 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쉽게 아는 척 했는데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거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생각했는데 약을 악착같이 챙겨 먹고 안 먹던 남의 살들을 먹으며 삶에 집착하는 나를 보았다.
우울증이라 생각했고 정신병원에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내 손에 들린 것은 바가바드기타와 비노바 바베의 책이었다. 전쟁터에서 싸울 수 없다며 징얼거리는 아루주나에게 최선을 다해 싸워 이기라는 크리슈나의 말. 죽음도 헛소리고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한다는 말이 약처럼 위로가 되었다. 나는 나에게 늘 미지의 영역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삶을 정리하던 경하에게 생명을 살리라는 인선의 부탁으로 경하가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보고, 어루만지며 함께 하는 것이 결국은 경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느꼈다. 인선이 베트남 밀림을 찾아갔던 것도, 인선의 엄마가 희생자 유족들을 만난 것도, 인선의 아버지를 찾아가 이야기를 들은 것도, 서로에게 온기의 생명을 불어넣어 줄 불꽃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음을. 

책을 읽고 조용한 가을길을 따라 산책에 나섰다. 콩이 보리가 앞장 서고 귀복이가 장난을 거는 모습을 보며 삶은 고통스럽지만 이토록 아름답다는 말이 떠올랐다. 벌목 후 조림한 노랗게 물든 목백합 나뭇잎들이 오후 햇살과 바람에 일렁이는 풍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무는 겨울을 나기 위해 자기 몸에 있는 모든 물을 버린다고 들었다. 그래서 나뭇잎을 물들이고 결국은 모두 떨구어 낸다고. 살기 위해 죽을 각오로 모든 것을 버린다고. 그 과정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저 목백합 나무는 내년 봄 시리도록 아름다운 연두빛 잎을 뿜어내며 다시 태어날 것이다. 백척간두 진일보가 아름다운 이유일까.  

생명 가진 것의 삶은 고통일수 밖에 없다면 나는 그 고통 속에서 연명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인정하고 자유롭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다. 일단 지금 여기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들여본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조금 덜 두렵다. 가는데 까지가 내 길이니까.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 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목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