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만의 교리서로 여겼던 책이 한 권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다. 당시부터 워낙에 유명한 추천 필독서였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연료 삼아 정신 팔지 말고 한 길로 달리라고 다그치는 환경속에 연약하기 짝이 없게 흔들려 나부끼는 학생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도저히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차를 펼치는 순간 '책 한 번 끝내주게 골랐군,' 하고 확신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당시에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 작가라는 사람들은 전부 계시를 받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계시를 받지 않고서야 자신을 돌이켜보며 세계를 바라보며 타인을 다시 세계로 끌어들이는 문장을 어떻게 적어낼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은 그런 방식으로 나도 몰랐던 세상에 속해있는, 동떨어진 듯 함께 존재하는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게 만들었다. 서로의 존재도 모르던 지구 반대편의 저자가 내 짧은 삶 전반에 대해 본 적도 없으면서도 진단을 해주는 것 같은 놀라운 시간을 겪고 나서 '답을 구하는 독서'에 빠져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답을 얻는 것만이 목적인' 독서에 빠져들었다.
나는 마치 미래도 통달할 만큼의 이해를 거쳤다는 듯한 착각에 꽤 오랜 시간 책으로부터 취한 관점들로 충분히 만족스럽게 불안을 통제할 수 있었다. 또래들이 불안해하는 것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중심을 잘 지키고 있으며 그것이 '앎'덕분이라고 일종의 착각 중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였기에 사실 상 경험의 폭이 한정적이었다는 사실은 알 지 못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새로운 고통과 혼란을 겪으며 완전히 처음 느껴보는 것 처럼 강렬한 불안들 속에 다시 헤매게 되었다. 본질적으로는 알랭 드 보통이 해설한 불안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텐데도, 전과 같은 문장들을 교리삼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해설 받았다고 생각한 감정들에 대해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와 답을 구하려는 것 만으로는 지친 심정안에서 길을 찾아낼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답이 있다는 것 조차 착각일지 모른다고 여기게 되었고, 무심코 '종교를 가질까? 미사를 나가거나, 절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를 읽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그 때를 떠올렸다.
'신'에 대한 신앙은 가져본 적이 없다. 오히려 수행하는 인간 때문에 종교를 조금씩 동경하게 된다. 지극히 경건한 이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들의 행동에 무언가가 깃들 때에, 혹은 깃들기를 기원하고 있을 때에 내게도 무언가가 함께 깃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 경건함에 대해 떠올리면 연상되는 경험을 몇 개 적어보고 싶다. 가장 최초에 감각하게 된 심상은 조모의 불경공부이다. 조모는 사교적이셔서 어디에서 살게 되든 동네 친구가 많으셨지만 또 혼자서도 평화로이 시간을 보내시는 분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별 약속이 없으셔서 심심하실 때면 먼저는 이불 위에 화투를 펼쳐두고 혼자서 '짝맞추기 놀이'를 하셨다. 그런데 화투패를 다루시는 손길이나 살펴보는 모습이 참 신중하셨기 때문에 묘하게 점을 치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훨씬 더 예전에는 분명 친구분들과 화투를 치기도 하셨던 것 같은데 어느 새 부터는 이 화투패를 혼자 짝맞추기 놀이 하시는데에만 쓰셨다. 불도 안 켜시고 어두운 방에서 짝맞추기를 하신 뒤에는 이부자리를 정리하시고 불경과 염주를 꺼내셨다. 화투패를 늘어놓던 그 자리 위에 불경을 펼쳐두시고, 염주를 손으로 굴려가며 낮고 느리게 주문과 같은 불경을 외셨다. 놀라운 것은 책은 펼쳐두었으나 보며 외시는 게 아니라 눈을 감은 채로 외셨는데, 앉은 채 몸을 좌우로 흔드시며 한손으로 염주를 굴리시다가, 한장 분량을 외고 나시면 눈을 뜨고 책장을 넘긴 뒤 다시 눈을 감은 채 다음 분량을 외셨다. 처음 이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영문을 몰라 조모 옆에 앉아 그 모습을 한참 관찰했던 것 같다. 한 권의 불경을 다 외시고 치우시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읽어요?' 하고 항상 여쭤보았는데 '그러니까 외는거지' 라는 식의 대답만 하셨다. 그 외의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고 뜻도 알려주지 않으시면서 혼자 외우시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는 게 좋았다. 비슷한 시간대에 이 행동들을 반복하곤 하셨고 나는 종종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구경했다.
조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셨을 때는 불교의 방식에 따라 49재를 지냈는데, 추운 겨울에 온 가족이 상복에 까만 외투를 껴입고 떨어가며 절에서 긴 시간의 재를 올렸다. 재를 올리는 공간은 난방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다들 발끝이 얼 것 같이 시려서 방석 밑으로 발을 넣고 저린 무릎에 꼼지락 꼼지락 자세를 바꿔가며 절차를 거쳤다. 그래도 조모님이 외시던 그 불경소리를 스님의 목소리를 통해 듣고있자니 고생을 하는 만큼 제대로 기리며 보내드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다. 특히나 스님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절 내부의 벽 사방을 울려 몸의 추위보다도 그 공명에 정신이 함께 모여드는 것 처럼 느꼈다. 조모님이 어떻게 해서 그리 불경을 외시게 되었는지 짐작해 보게 된 순간이다. 그 때에는 가족들 모두 눈이 오면 오는대로, 맑으면 맑은대로, 조부모님들이 우리를 보며 대답을 하시나보다며 기뻐하기도 했다.
또 다른 경험은 스위스에 여행을 갔을 때 들른 베른 대성당에서 성가대 소프라노와 연주자들이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던 일이다. 빠듯한 일정에 일행들과 '이 성당을 안 보고 갈 순 없으니까 들렸다 갑시다' 라며 들어섰다가 예상치도 못한 광경을 함께하게 된 것이다. 성당 안에는 우리 일행들과 연습하는 분들 뿐이었는데, 우리는 사로잡힌 듯 알아서 띄엄 띄엄 자리를 잡고 앉았고 소프라노는 관객이 생기자 더더욱 열중하여 경지에 오른 것 처럼 아름답고 충격적으로 황홀한 목소리로 공간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으며 자리에 앉아있자니 번뇌가 씻겨나가고 마음의 속박이 풀어지는 것 같은 착각에, 신앙을 가지는 마음이 어쩌면 내세나 신에 대한 기원 뿐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 평화롭고 충만해지는 길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공간을 메우는 것이 이리도 경건하다면 매 주 함께 모여 기도하고 미사를 올리는 절차란 얼마나 신성하고 경건할까.
이런 종류의 의례 역시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 현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지 않으며 그 행동에 인과 관계가 없으나 분명히 수행함 자체 만으로 어떤 역할을 해준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 자신이 의례를 갈망하는 인간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모습에 동조하고 싶어지는 것은 명백히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진화적으로 새겨진 갈망의 일종이기는 할 수 있으나 어쩌면 단순한 동경에 그치는 정도이기도 한 듯 하다. 감명을 받으며 전해 얻은 생기를 동력삼아 다시금 설명 가능한 답을 얻고자 헤메는 길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는 의례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하거나 안심할 수가 없다. 의례에서 얻은 내면의 힘을 가지고 다시 도구적 자세로 향하게 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에서 어떤 불필요한 듯 하거나 비합리적인 행위가 그럼에도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필요하고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는 시각을 바탕으로 의례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변화하는 세상에 헐레벌떡 따라가는 이들이 마냥 수동적이라고만 볼 수 없기도 하다는 것이 읽던 중 새로이 떠오른 의견이다. 오히려 나는 힘의 논리에 동조하지조차 않는 많은 사람들이 달리 선택지가 없는 듯 하여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적극적으로 진화적 부조화로 보이는 흐름에 힘을 싣고 있다고 느낀다. 오늘날의 대중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기술에 휘말리고 있다고 볼 때에 대중은 자신을 위하는 길을 선택하는 능력에 있어 '무심함'과 '무능력함'을 전제로 얻는 것 아닌가? 급격한 변화에 발맞추느라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 현실의 사회를 이루는 인간의 주류는 유의미한 성찰을 하지 못하며 자신에게 무엇이 득인지 모르는 무능력자들인가? (때로는 그렇게 보일 수 조차 있다, 역사적인 사례조차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책에서는 특정 문화권의 이국적인 행사의 의미가 현지인들만의 공감대와 맥락을 가지고 있어 외지인으로서는 압도될지라도 온전히 같은 것을 느낄 수는 없을정도의 '집단의식'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실험실을 현지로 가져가는 게 적절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 관점은 우리 스스로를 진화적 부조화로 이끌고 가는 것이 자명한 현실에도 적용해 볼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 오히려 의례를 실천하는 행위를 통해 누군가는 힘을 얻어 다시 "기술 혁신"에 박차를 가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오늘날의 해악과 같은 스마트폰을 고안해 낸 스티브 잡스도 명상의 힘에 대해, 그리고 경건함이 주는 효과에 대해 설파하고 신봉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찌보면 극단적인 발상에 다다른 것은 모순적이게도 내가 불안을 다시 다스려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행동활성화 치료'를 따르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책에서도 언급된, 적정 수준 이상의 스트레스는 감정 조절과 인지에 영향을 주는데, 인지행동학에서 설명하기로는 이 탓에 뇌의 우반구가 과잉활성화되어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고 '퉁'치게 되면서 우울감이 커지거나 지속되게 된다고 한다. 감정이 원인이어서 행동을 해낼 수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 '무기력증'이 되는데, 행동활성화 치료는 반대로 행동을 함을 통해서 새로운 감정을 찾아내는 활동을 권장하는 방법이다. 이 치료가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황이나 행동 때문에 변하는지 꾸준히 기록하며 기제를 이해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도해보면서 놀라웠던 것은 일종의 의례와 같은 행동에 해당하는 루틴을 가질 때, 비록 혼자서 실천하더라도 어느정도 감정이 긍정적으로 전환된다는 점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종이 인센스에 불을 붙이고, 티베트 싱잉볼 소리를 재생해두고 명상을 하는데 이것이 하루동안 겪는 초조함이나 불안도를 눈에 띄게 안정시켜준다.
외에도 확언을 쓴다던지 하는 루틴을 실천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스트레스가 확연히 사그라들고, 혹 어떤 상황이 닥쳐서 감정이 요동치더라도 나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하면 감정은 충분히 전환된다는 믿음이 생겼다. 심지어는, 책에서 언급된 적정 수준일 때에 유익하기 까지한 스트레스를 오랜만에 겪게 되면서, 지나친 스트레스 상황일 때와 명백히 비교될 정도의 활기를 얻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니 지칠 때에 의례를 동경하던 마음은 뒤로하고 어느 새 경쟁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 함께하며 '유능감'을 겪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조차 있었고, 이를 '나아짐'의 신호로 반기게 되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건강해져가는 것은 자신을 위해 환영할 일이나, 그 덕에 내가 불안을 견뎌가며 속하고자 선택하는 것은 다소 관성적인 환경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순 들었다.
그래서 의례라기보다는 나름의 미신에 좀 더 가깝다고 할 만한, 타로카드 점에서 힌트를 얻고자 한다. 아래의 이미지는 타로카드 중 메이저 아르카나 8번, 힘 카드이다. 타로카드는 그림을 보며 느껴지는 것을 읽는 것이 기본인데, 이 카드에는 온화한 여신이 맹수인 사자를 길들이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있다. '힘'을 상징하는 동시에 '통제' '규율'로 읽지만, 여인이 사자를 길들일 때 발휘하는 힘은 무력이 아니기 때문에 '포용' '균형' '자신감' '지혜' '내면의 힘'으로 읽기도 한다. 위협이 될 수 있는 외부의 힘을 다루기 위한 내면의 힘은, 통제에 대한 절실함으로 경직될 때가 아니라 쓰다듬는 행위를 하기 위해 다가가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