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자기 중심적 사랑관

더듬이
2025-08-29 21:07
8월 28일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의 글을 발췌했다.

요즘 많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물으면 사랑 받는 것을 생각한다. 최고선도 따라야 할 이상보다 개인의 행복과 심리적 만족을 꼽는다. 1979년 크리스토퍼 래쉬는 <나르시시즘 문화>에서 현대인의 심리 치유 집착과 소비 자본주의가 결합해 자기애적-자기중심적이고 취약하며 인정 갈망에 사로잡힌 개인을 양산한다고 썼다.

이런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도 타인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긍정적이고 다정한 관심을 보일 때 느끼는 감정으로 여긴다.

하지만 덜 자기 중심적인 문화권과 시대에선 사랑이란 자기 위안보다 자기 희생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본능적 이기심을 넘어서는 강력한 힘으로 여겼다.

그런 사랑은 경외심에서 시작된다. 아름답고 선하며 진실해 보이는 타인의 모습을 엿보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장 소중한 보물이 다른 사람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스탕달의 1822년 저서 <사랑에 관하여>에 잘 나온다.

이런 사랑은 자기 이익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대가를 따지지 않고 순응하는 시적인 항복이다. 자신의 힘을 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제력을 잃는 과정이다.

시인 존 오도노휴의 말처럼 “매력에는 사랑스러운 혼란이 따른다” “누군가에게 깊이 끌리게 되면 삶을 질서 있게 잡아주던 틀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잃기 시작한다. 그의 얼굴이 선명해질수록 삶의 많은 부분이 흐릿해진다. 끊임없는 자력이 모든 생각을 그쪽으로 끌어당긴다.”

이런 사랑은 단순한 감정(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이 아니라 동기 부여 상태, 즉 다른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섬기고자 하는 갈망이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한 온전한 존재가 다른 온전한 존재와 하나가 되는 이 결합은 주고받는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사랑하는 이에게 줄 때는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 같고,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준다. 이 주는 행위, 즉 사랑의 목적은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

에리히 프롬은 1956년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며 기술/예술art의 형식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삶과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이는 기율과 배려, 존중, 이해, 그리고 자기애의 극복 같은 일련의 행동을 요구한다.

이 시대의 주요 문제인 자기중심성에는 이런 사랑이 필요하다. 너무나 많은 ‘나’의 시대로 오면서 자기희생의 미덕은 자기표현의 정신으로 대체됐다. 인스타와 틱톡, 백악관을 보라.

주변의 많은 불행과 단절이 어느 정도는 이런 심리치료적, 자기애적, 자기과시 문화의 점진적 축적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문화가 자기 욕구를 우상화하도록, 즉 자기실현과 자존감, 자기표현에 집중하도록 부추길 때 그것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욕심 많고 예민하며 불안정한 사람을 양산한다.

자기애주의자는 타인을 진정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가 인지하는 유일한 현실은 타인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뿐이다.

요즘 자기계발 베스트셀러를 보라.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법보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얘기한다. 흔한 주제가 '타인에게 휘둘리지 마라'다. 지금 아마존 1위인 <렛 뎀 이론> 주제가 타인 통제하고 개선하려는 충동 내려놓고 오로지 자기 웰빙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자아중심 문화가 뒤집힌 사랑 이론 쏟아 놓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간혹 사람들은 남을 사랑하기 전에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뒤집힌 논리다. 자신을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보기 전에, 또 정말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려면, 자신이 먼저 타인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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