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간, 생각, 철학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9-28 10:21
AI 기업은 왜 철학자를 필요로 하는가.

원문: The Id, the Ego and the Superintelligence

AI는 정보 검색, 요약, 그리고 이미 말해진 것을 재조합하는 일을 잘 한다. 서툰 것은 철학이 수천 년 동안 인간에게 훈련시켜 온 것, 즉 ‘판단’이다. 그래서 AI 기업들은 철학자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자문을 구하거나, 트롤리 딜레마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급여와 보험까지 제공하며 고용한다.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고에는 잊기-또한 언제 잊어야 할지 알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판단은 계산이 아니다. 그것은 저울질하고, 구별하며, 어떤 답이 진실이고 어떤 답이 그저 정답일 뿐인지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그것은 취향이자 안목이며 비스듬히 생각하는 재주다. 이는 오직 경험-실수, 당혹감, 지루함, 슬픔,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숙취를 통해서만 다듬어진다.
   
의미는 우리가 필멸자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우리가 죽을 운명이며 그 사실을 알기에 세상은 우리에게 중요하게 여겨진다. 불멸 속에선 어떤 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
   
동료 철학자 크리스티안 마즈베르그Christian Madsbjerg는 튜링 테스트보다 더 나은 테스트를 제안한다. 기계가 사회 불안감을 경험할 수 있을까? 새벽 4시에 저녁 때 했던 어리석은 말 떠올리며 뒤척일 수 있을까? 인간적인 의미에서 지능을 갖추려면 기계는 ‘신경을 써야’ 한다.
   
AI 기업들은 왜 철학자를 뽑는가. 앤트로픽의 소규모 철학자 팀원인 아만다 애스켈은 철학 박사인데 임무가 이 회사 AI 성격을 빚는 것이다. 구글 딥마인드는 케임브리지 출신 철학자 헨리 셰블린을 새로 신설된 ‘철학자’ 직책에 임명했다. 오픈AI는 챗GPT의 기본 원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도덕 철학자”와 상의했다고 한다.
   
왜 하필 지금일까? AI 기업들이 직면한 질문들이 공학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는 슬픔에 잠긴 사람, 외로운 사람, 새벽 4시에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뭘 말해야 할까? 그 기계는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할까? 솔직해야 할까, 아첨해야 할까, 회피해야 할까, 친절해야 할까? 그런 존재가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존재에게 우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이 질문들은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것이다. 공학자들은 아무리 많은 계산 능력을 동원해도 이런 질문들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리는 인터넷에서 긁어모을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터넷은 바로 우리가 윤리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 현대의 기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아이러니가 있다. 오래된 것이다. 철학사에서 기록된 최초의 기술에 대한 공포는 바로 AI가 이제 완벽히 구현해 낸 것, 즉 ‘인공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숫자, 기하학, 천문학, 체스, 주사위를 발명한 이집트의 신 테우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테우트는는 자신의 걸작인 ‘글쓰기’를 이집트의 신왕 타무스에게 선보인다. 테우트는 이 발견이 이집트인들을 더 현명하게 만들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기억을 위한 ‘파르마콘(pharmakon)’, 즉 치료제라는 것이다. 타무스는 설득되지 않는다. 그는 글쓰기가 영혼에 망각을 심어줄 것이라고 반박한다. 사람들은 외부의 표식에 의존하게 되어 내면에서 기억하는 것을 그만두게 될 것이며, 실체 없는 지혜의 명성만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파르마콘’은 뜻밖에도 ‘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이후로 인쇄기, 소설, 텔레비전, 스마트폰, 챗봇에 대한 모든 공포는 타무스의 말을 뒷받침하는 각주였으며, 물론 아이러니한 점은 우리가 글쓰기에 대한 그의 경고를 아는 것도 플라톤이 그걸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파이드로스>의 관점에서 볼 때, AI는 단절이 아니라 정점이며, 기억 외부화의 종점이자 가장 과감한 결실을 나타내며, 통째로 삼켜진 치료제이자 독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와 기계 사이의 차이가 가장 깊게 드러난다.
   
AI는 기억 기계이며 지금껏 고안된 것 중 가장 웅장한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건망증이 심한 동물이다. 이 유쾌하게 망각하는 존재가 기억하게 만들고-약속과 빚, 도덕성을 갖게 하기 위해선-수천 년에 걸친 훈련과 끔찍할 정도의 잔혹함이 필요했다. 니체는 “무언가가 기억에 남으려면 그 안에 새겨져야 한다”고 썼다. 이 점에서 양심은 채찍을 동반한 기억술이다.
   
그러나 니체는 또한 그가 ‘능동적 망각’이라 부른 것을 소중히 여겼고, 이를 힘의 한 형태, 심지어 건강의 한 형태로 여겼다. 잊음은 물이 새는 양동이 같은 게 아니라 문지기다.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경험이 끝없이 우리에게 억지로 다시 주입되는 대신 소화될 수 있도록 의식의 문을 닫아주는 존재다. 우리는 잊고 앞으로 나아간다. 용서, 수면, 명랑함, 재혼, 좋아하는 축구 클럽을 계속 응원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과거가 자비롭게 씻겨 나가야만 가능하다.
   
몇 년 전, 나는 “메모리 시어터”라는 짧은 책을 썼다. 이 책은 과거의 모든 조각을 거대한 기억의 궁전에 정리하며 완전한 기억 재현을 시도한 철학자(나보다 훨씬 더 끔찍한 버전의 나 같은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에게 좋은 결말은 없었다. 그런 결말은 결코 없다.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존재는 초지능이 아니라, 자신의 아카이브 아래 산 채로 묻힌 폐허일 뿐이다. 
   
우리가 구축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애도할 수도, 용서할 수도, 놓아줄 수도 없는 무한한 아카이브다. 애초에 그 아카이브는 아무것도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계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이상하게도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없다.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AI 시대에 철학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철학자들이 기계보다 더 잘 기억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정말로 우리는 그럴 수 없다-하지만 철학은 경험을 어떻게 다룰지 아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간직하고, 버리고, 비웃고, 폐기할지를 말이다. 사고란 모든 것을 축적하는 게 아니라, 신중하고 능동적인 망각의 기술이다.
   
AI 기업들이 철학자들을 고용할 때, 그걸 알든 모르든, 실제로 구매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정답이 아니다-하늘이 아시다시피 우리에겐 정답 따위란 없으니까; 25세기가 지났지만, 철학자들은 여전히 우리의 작업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열정에 대한 훈련된 회의주의, 진실과 단지 그래 보이는 것 사이의 차이를 가려내는 귀, 그리고 유한성에 대한 전문적인 친숙함이다.
   
기계는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보존할 가치가 있는지는 여전히 누군가가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은 훈련 데이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목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