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
2025-04-01 15:51
지난번에 미소에 대해 썼다. 웃음의 반대는 울음이다. 웃음이 기쁨과 즐거움의 표정이라면 울음은 슬픔과 아픔의 표출이다.
웃음과 울음은 대칭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의 의미나 깊이로 보자면 웃음보다 울음 쪽이 훨씬 폭이 넓다. 물론 웃음도 정말 기뻐서 웃는 함박 웃음이 있는 반면 남을 내려다보는 비웃음이나 마뜩지 않을 때 지어 보이는 썪소 같은 것이 있을 정도로 의미의 스펙트럼이 있지만, 울음만큼은 아닌 것 같다. 가령 울음은 슬플 때도 나오지만 너무나 기쁠 때도 터져 나온다. 정반대의 감정을 울음은 다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울음은 어떤 감정이든 극에 달했을 때 절로 터져 나오는 몸(감정선과 눈물샘)의 반응인 것 같다.
울음의 극한은 통곡일 것이다. 살다가 크고 작게 눈물을 흘릴 때가 왕왕 있지만 통곡까지 가는 경우는 많지는 않다.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정도가 떠오른다. 나도 가족이 돌아갔을 때나 몇몇 상가집에 문상을 가서 소리 내 운 적이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니면서도 통곡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뒤늦게 알고 난 직후였다. 한참을 꺼이꺼이 운 기억이 난다. 기록과 사진으로 접한 많은 희생자들의 아픔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런 비극을 그때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살았던 나 자신,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거짓 속에 살도록 만든 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더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그런 세상의 도덕적 부조리)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슬펐기 때문이었다. 통곡 이후 내 삶의 진로도 바뀌었던 것 같다.
'통곡의 벽'이라는 곳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다. 그 도시 관광 명소 중 하나다. 가 본 적도 있다. 유대인들의 슬픈 역사가 깔린 곳이지만, 그런 배경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그곳을 보면서, 우리도 어디엔가 누구나 슬플 때 그냥 찾아가서 목 놓아 울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처연히 한껏 울고 나서야 다시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일어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마지막 장면도 우는 장면이다. 천하무적의 장수 아킬레우스가 자신에게 목숨을 잃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온 노부 프리아모스의 딱한 모습을 보고 부둥켜안고 운다. 가끔은 요즘 사람들도 한 번씩 서로의 잘못과 아픔을 뉘우치고 달래는 통곡의 의례를 실천하면 어떨까 싶을 때가 있다.
조금 전 헌재가 마침내 오는 4일 판결한다는 뉴스가 떴다. 아, 이날에도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까. 분노와 탄식과 통한의 눈물이든, 정의의 승리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든, 아니면 오랜 싸움과 고통에 대한 쌓인 감정의 북받침에서 나온 눈물이든. (요즘 시위 문화를 보면 울음보다는 웃음 쪽일 것 같기도 하다. 환호의 웃음이든 허탈의 웃음이든)
부디 또 다시 비탄의 통곡이 터져 나오는 일만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웃음과 울음은 대칭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의 의미나 깊이로 보자면 웃음보다 울음 쪽이 훨씬 폭이 넓다. 물론 웃음도 정말 기뻐서 웃는 함박 웃음이 있는 반면 남을 내려다보는 비웃음이나 마뜩지 않을 때 지어 보이는 썪소 같은 것이 있을 정도로 의미의 스펙트럼이 있지만, 울음만큼은 아닌 것 같다. 가령 울음은 슬플 때도 나오지만 너무나 기쁠 때도 터져 나온다. 정반대의 감정을 울음은 다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울음은 어떤 감정이든 극에 달했을 때 절로 터져 나오는 몸(감정선과 눈물샘)의 반응인 것 같다.
울음의 극한은 통곡일 것이다. 살다가 크고 작게 눈물을 흘릴 때가 왕왕 있지만 통곡까지 가는 경우는 많지는 않다.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정도가 떠오른다. 나도 가족이 돌아갔을 때나 몇몇 상가집에 문상을 가서 소리 내 운 적이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니면서도 통곡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뒤늦게 알고 난 직후였다. 한참을 꺼이꺼이 운 기억이 난다. 기록과 사진으로 접한 많은 희생자들의 아픔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런 비극을 그때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살았던 나 자신,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거짓 속에 살도록 만든 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더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그런 세상의 도덕적 부조리)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슬펐기 때문이었다. 통곡 이후 내 삶의 진로도 바뀌었던 것 같다.
'통곡의 벽'이라는 곳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다. 그 도시 관광 명소 중 하나다. 가 본 적도 있다. 유대인들의 슬픈 역사가 깔린 곳이지만, 그런 배경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그곳을 보면서, 우리도 어디엔가 누구나 슬플 때 그냥 찾아가서 목 놓아 울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처연히 한껏 울고 나서야 다시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일어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마지막 장면도 우는 장면이다. 천하무적의 장수 아킬레우스가 자신에게 목숨을 잃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온 노부 프리아모스의 딱한 모습을 보고 부둥켜안고 운다. 가끔은 요즘 사람들도 한 번씩 서로의 잘못과 아픔을 뉘우치고 달래는 통곡의 의례를 실천하면 어떨까 싶을 때가 있다.
조금 전 헌재가 마침내 오는 4일 판결한다는 뉴스가 떴다. 아, 이날에도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까. 분노와 탄식과 통한의 눈물이든, 정의의 승리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든, 아니면 오랜 싸움과 고통에 대한 쌓인 감정의 북받침에서 나온 눈물이든. (요즘 시위 문화를 보면 울음보다는 웃음 쪽일 것 같기도 하다. 환호의 웃음이든 허탈의 웃음이든)
부디 또 다시 비탄의 통곡이 터져 나오는 일만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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