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11시 22분
2025-04-04 21:00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요즘 빌어먹을 스마트폰 때문에 내 머리는 점점 스마트함을 잃어가는 바람에 기억하는 의미 있는 숫자가 몇 안 되는데, 이 연월일시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헌재소장이 판결문을 읽어가던 끝에 최종 주문을 선언하기에 앞서 그 순간의 정확한 시간을 확인했다. 탄핵 효력 발생 시간을 계산하기 위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44, 11, 22, 무슨 로또 번호처럼 쌍을 이루는 숫자가 나란히 열거되었다. 11시 22분. (혹시 초침은 33을 가리키진 않았을까) 게다가 주문의 내용까지 재판관 8명 전원 일치의 역사적인 파면 결정이었으니 일부러라도 기억해 둘만 하다.
정치적 견해로 싸울 일은 없는 친구와 진작에 약속했던 제철 음식 도다리쑥국으로 점심을 한 후에 날도 좋고 기분도 좋아 양재천을 함께 걸었다. 마침 어제부터 시작된 벚꽃 축제 장터가 한창이다. 부스 중에 아담한 꽃집도 한 곳 있었다. 친구가 앞장서 기웃거리더니 하나를 골라 보라고 했다. 탄핵 기념으로 점심을 산 데 대한 답례인 모양이다. 색색의 꽃들 사이에서 청보랏빛의 수국을 골랐다.
집으로 와서 창가 화이트 카랑코에 화분 옆에 두고 보니 제법 잘 어울린다. 화분에 이름을 붙여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부로 하나는 탄핵, 하나는 민주라고 불러 줄까. (그런데 탄핵과 민주라고 하면 극적으로 대비가 되는 이름의 형평성을 두고 어느 한 쪽이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까. 나 같아도 민주라 불리는 건 좋지만 탄핵이라 부르면 기분 나쁠 것 같다. 그렇다면 각각의 이름을 특정하지 말고 언제나 둘을 함께 탄핵과 민주라 부르면 어떨까. 서로 자신이 민주라 여기고 탄핵일리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거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어느 하나가 기특하게도 친구를 위해 탄핵이라는 이름을 자처하는 아량을 베풀지. 아마 마음씨 좋은 그 꽃은 더 예쁘게 필 것이다. 탄핵과 민주라는 상반되면서도 밀접한 이름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막중한 판결문을 작성하고 난 재판관마냥 마음 한 켠이 뿌듯해지기까지 한다.)
간신히 잡아넣은 현행범을 법원이 석연찮은 이유로 풀어주고 검찰이 주저 없이 이를 수용하는 걸 보고, 또 헌재가 예상을 깨고 차일피일 선고를 미루는 걸 보고 신경이 한껏 곤두섰었는데 오늘로 천만다행하게도 큰 산을 무사히 넘었다. 그래봐야 '정상'으로 돌아온 것에 불과하지만, 불과라고 하기엔 너무나 힘들게 이룬 성취 아닌가.
알라딘이 발 빠르게 헌재 결정문 전문을 전자책으로 무료 배포하기 시작했다.
내려받아 천천히 읽다가 건너뛰다가 하다 보니 결론부에 가서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제1조 제1항).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대등한 동료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
대등한 동료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
대등, 존중, 박애, 자율, 협력.
우리나라가 부디 이 주춧돌 위에서 오똑이처럼 일어나 한 발 한 발 느리더라도 착실히 다시 앞으로 나아가길 기도한다.
4월 4일 밤 9시 정각이다.
요즘 빌어먹을 스마트폰 때문에 내 머리는 점점 스마트함을 잃어가는 바람에 기억하는 의미 있는 숫자가 몇 안 되는데, 이 연월일시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헌재소장이 판결문을 읽어가던 끝에 최종 주문을 선언하기에 앞서 그 순간의 정확한 시간을 확인했다. 탄핵 효력 발생 시간을 계산하기 위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44, 11, 22, 무슨 로또 번호처럼 쌍을 이루는 숫자가 나란히 열거되었다. 11시 22분. (혹시 초침은 33을 가리키진 않았을까) 게다가 주문의 내용까지 재판관 8명 전원 일치의 역사적인 파면 결정이었으니 일부러라도 기억해 둘만 하다.
정치적 견해로 싸울 일은 없는 친구와 진작에 약속했던 제철 음식 도다리쑥국으로 점심을 한 후에 날도 좋고 기분도 좋아 양재천을 함께 걸었다. 마침 어제부터 시작된 벚꽃 축제 장터가 한창이다. 부스 중에 아담한 꽃집도 한 곳 있었다. 친구가 앞장서 기웃거리더니 하나를 골라 보라고 했다. 탄핵 기념으로 점심을 산 데 대한 답례인 모양이다. 색색의 꽃들 사이에서 청보랏빛의 수국을 골랐다.
집으로 와서 창가 화이트 카랑코에 화분 옆에 두고 보니 제법 잘 어울린다. 화분에 이름을 붙여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부로 하나는 탄핵, 하나는 민주라고 불러 줄까. (그런데 탄핵과 민주라고 하면 극적으로 대비가 되는 이름의 형평성을 두고 어느 한 쪽이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까. 나 같아도 민주라 불리는 건 좋지만 탄핵이라 부르면 기분 나쁠 것 같다. 그렇다면 각각의 이름을 특정하지 말고 언제나 둘을 함께 탄핵과 민주라 부르면 어떨까. 서로 자신이 민주라 여기고 탄핵일리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거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어느 하나가 기특하게도 친구를 위해 탄핵이라는 이름을 자처하는 아량을 베풀지. 아마 마음씨 좋은 그 꽃은 더 예쁘게 필 것이다. 탄핵과 민주라는 상반되면서도 밀접한 이름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막중한 판결문을 작성하고 난 재판관마냥 마음 한 켠이 뿌듯해지기까지 한다.)
간신히 잡아넣은 현행범을 법원이 석연찮은 이유로 풀어주고 검찰이 주저 없이 이를 수용하는 걸 보고, 또 헌재가 예상을 깨고 차일피일 선고를 미루는 걸 보고 신경이 한껏 곤두섰었는데 오늘로 천만다행하게도 큰 산을 무사히 넘었다. 그래봐야 '정상'으로 돌아온 것에 불과하지만, 불과라고 하기엔 너무나 힘들게 이룬 성취 아닌가.
알라딘이 발 빠르게 헌재 결정문 전문을 전자책으로 무료 배포하기 시작했다.
내려받아 천천히 읽다가 건너뛰다가 하다 보니 결론부에 가서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제1조 제1항).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대등한 동료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
대등한 동료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
대등, 존중, 박애, 자율, 협력.
우리나라가 부디 이 주춧돌 위에서 오똑이처럼 일어나 한 발 한 발 느리더라도 착실히 다시 앞으로 나아가길 기도한다.
4월 4일 밤 9시 정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