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어린이
2025-04-15 20:10
남을 위한 행동은 좋다.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행동을 스스로 자랑하는 행동은 어떻게 봐야 할까. 내 눈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앞에서 말한 호의적 평가는 반감된다. 남을 위한 행동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은 진정으로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위한 수단, 이를테면 자신의 평판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계산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위장된 선, 가짜 선, 위선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애당초 남을 위한 행동이었는데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남들에게 알려졌다면 어떨까. 적어도 앞에서 말한 위선의 비난에서는 면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 사람의 선의를 높이 사고 그를 좋아하거나 존경하게 된다. 그런 평판은 선행을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정당하고도 합당한 보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을 위한 행동이 진정으로 남을 위한 행동이었는지, 사실은 자신을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는지는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많은 경우 주변 사람들의 눈과 입소문을 통해 분간이 되거나 그 사람의 언행을 반복해서 두고 보다 보면 결국에는 가려질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계산의 정도가 치밀해서 대다수가 속아 넘어가는 일은 없을까? 다분히 그럴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자신의 평판이든 명예든 또 다른 보상을 염두에 둔 것이든 그것이 다수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기꺼이 박수를 치고 그의 명예욕을 충족시켜 주는 것에도 동의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요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어른 김장하'라는 인물이 주는 여운 때문이다. 다큐 영화에 담긴 그의 모습이나 최근 재조명된 그의 언행에서 두드러진 점은 극도로 말수가 적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침묵에 가까운 과묵이 더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것만 같다. 그의 눈빛을 보면 그 마음의 깊이가 쉽게 가늠이 안 될 정도다. 세상을 달관한 것도 같고.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 사는 것도 아니다. 누구보다 현실의 각박함과 그에 따른 애환을 잘 아는 사람 같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말은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푸념 중 하나다. 그럼에도 김장하는 '어른'이라 불리기에 값하는 인물 같다.
어른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인가. 어원을 찾아 보니 '얼우다'에서 왔다고 하는 설명이 그나마 그럴듯하다. 얼우다는 고문헌에 '남녀가 관계하다, 혼례를 맺다'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결혼해서 상투를 틀거나 댕기머리 신세를 면하면 어른이 됐던 것. 이 때의 어른이란 '지혜롭다'거나 '공경할 만하다'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다. 그저 적령기가 되었거나 성인으로서 사회적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에 비하면 '어른 김장하'를 수식하는 '어른'은 인격적으로 우러를 만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라고 할 때는 '믿고 따르고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뜻이다.
반면 '어린이'라는 말은 근대에, 일제강점기 때 아동문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소파 방정환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데, 어근 '어린'은 '어리다'에서, '어리다'는 '어리석다'에서 왔다고 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직은 미숙한, 그래서 어리숙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즘 어린이가 '어리숙한지'는 모르겠다. 내 눈에는 어린애 같은 어른, 어른 행세를 하려 드는 어린이만 자주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것에만 온통 시선을 빼앗긴 시대, 남의 눈에 들기 위해 모두가 혈안이 된 시대.
그런 시선에서 좀 초연한(외면이 아니라) 사람, 눈앞의 것 너머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더 자주,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행동을 스스로 자랑하는 행동은 어떻게 봐야 할까. 내 눈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앞에서 말한 호의적 평가는 반감된다. 남을 위한 행동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은 진정으로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위한 수단, 이를테면 자신의 평판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계산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위장된 선, 가짜 선, 위선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애당초 남을 위한 행동이었는데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남들에게 알려졌다면 어떨까. 적어도 앞에서 말한 위선의 비난에서는 면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 사람의 선의를 높이 사고 그를 좋아하거나 존경하게 된다. 그런 평판은 선행을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정당하고도 합당한 보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을 위한 행동이 진정으로 남을 위한 행동이었는지, 사실은 자신을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는지는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많은 경우 주변 사람들의 눈과 입소문을 통해 분간이 되거나 그 사람의 언행을 반복해서 두고 보다 보면 결국에는 가려질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계산의 정도가 치밀해서 대다수가 속아 넘어가는 일은 없을까? 다분히 그럴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자신의 평판이든 명예든 또 다른 보상을 염두에 둔 것이든 그것이 다수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기꺼이 박수를 치고 그의 명예욕을 충족시켜 주는 것에도 동의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요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어른 김장하'라는 인물이 주는 여운 때문이다. 다큐 영화에 담긴 그의 모습이나 최근 재조명된 그의 언행에서 두드러진 점은 극도로 말수가 적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침묵에 가까운 과묵이 더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것만 같다. 그의 눈빛을 보면 그 마음의 깊이가 쉽게 가늠이 안 될 정도다. 세상을 달관한 것도 같고.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 사는 것도 아니다. 누구보다 현실의 각박함과 그에 따른 애환을 잘 아는 사람 같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말은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푸념 중 하나다. 그럼에도 김장하는 '어른'이라 불리기에 값하는 인물 같다.
어른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인가. 어원을 찾아 보니 '얼우다'에서 왔다고 하는 설명이 그나마 그럴듯하다. 얼우다는 고문헌에 '남녀가 관계하다, 혼례를 맺다'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결혼해서 상투를 틀거나 댕기머리 신세를 면하면 어른이 됐던 것. 이 때의 어른이란 '지혜롭다'거나 '공경할 만하다'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다. 그저 적령기가 되었거나 성인으로서 사회적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에 비하면 '어른 김장하'를 수식하는 '어른'은 인격적으로 우러를 만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라고 할 때는 '믿고 따르고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뜻이다.
반면 '어린이'라는 말은 근대에, 일제강점기 때 아동문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소파 방정환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데, 어근 '어린'은 '어리다'에서, '어리다'는 '어리석다'에서 왔다고 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직은 미숙한, 그래서 어리숙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즘 어린이가 '어리숙한지'는 모르겠다. 내 눈에는 어린애 같은 어른, 어른 행세를 하려 드는 어린이만 자주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것에만 온통 시선을 빼앗긴 시대, 남의 눈에 들기 위해 모두가 혈안이 된 시대.
그런 시선에서 좀 초연한(외면이 아니라) 사람, 눈앞의 것 너머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더 자주,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
아무리 세월이 흘러 어느새 보니 나이가 몇이 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보는 관점인 자아 자체는 이것을 큰 변화로 여기지 못하다보니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나이만 먹었구나'하고 한탄하는 말들이 큰 공감을 얻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가 세상을 바라보고 발견하고 놀라워한다면 어른은 분명 이것들을 잘 갈무리하고 겪어나가는 동안 지혜와 현명함을 쌓아가야겠습니다. 그런 어른이 여전히 되고싶습니다.
어린에서 어른으로. 내 안에 어린과 어른이 공존하는 어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