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투말리아
2025-04-17 07:22
글은 거울이다. 생각을 밖으로 꺼내 놓고 봐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 더 또렷이 보인다. 거울의 기능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글은 정직하고 선명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버찌 책방에 '별이'라는 개가 있다. 그 녀석이 처음 대면한 이후부터 줄곧 만날 때마다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을 사로잡는 데가 있다. 정말 진심을 담은 눈길이다. 주의는 애착과 관련 있고, 애착은 의존과도 관련 있다. 태어나서 의지해야 하는 존재에 애착을 느끼고 키워간다. 그것이 성숙된 형태로 자랐을 때 사랑이 된다. 개는 인간과 오랫동안 공진화해 왔다. 처음에는 개가 인간 무리에 의지하려 들었을 수 있고, 개가 인간에게도 도움을 주면서 인간 역시 개에 의지하게 된 면이 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특히 개의 주인에 대한 주의력은 남다르게 되었고, 그 눈빛이나 충성심은 웬만한 인간을 능가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개가 주인을 그토록 잘 따르고 충직성을 보이는 것은 그 결과다. (개가 주인에게 기울이는 주의력이나 관심이나 충성심에게서 인간은 인간에 대한 태도와 관련한 뭔가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대화할 때 상대에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이라든가..) 고양이는 개에 비하면 한참 신참이다. 그래서 아직 거리가 있다. 물론 개와는 다른 과의 고양이 특유의 기질 또한 꽤나 완고하게 유지될 것이다. 그게 매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이탈리아 나폴리 태생의 '얼굴 없는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자신의 글쓰기를 이야기하면서 '프란투말리아frantumaglia'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알려준 단어인데, 머릿속에서 온갖 파편들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인간(의 정신)을 이야기하는 원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자신의 작품에서도 어느 순간 주인공의 정신이 어떤 사건에 직면해 일순간 해체되는 듯한 장면을 그린다.
버찌 책방에 '별이'라는 개가 있다. 그 녀석이 처음 대면한 이후부터 줄곧 만날 때마다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을 사로잡는 데가 있다. 정말 진심을 담은 눈길이다. 주의는 애착과 관련 있고, 애착은 의존과도 관련 있다. 태어나서 의지해야 하는 존재에 애착을 느끼고 키워간다. 그것이 성숙된 형태로 자랐을 때 사랑이 된다. 개는 인간과 오랫동안 공진화해 왔다. 처음에는 개가 인간 무리에 의지하려 들었을 수 있고, 개가 인간에게도 도움을 주면서 인간 역시 개에 의지하게 된 면이 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특히 개의 주인에 대한 주의력은 남다르게 되었고, 그 눈빛이나 충성심은 웬만한 인간을 능가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개가 주인을 그토록 잘 따르고 충직성을 보이는 것은 그 결과다. (개가 주인에게 기울이는 주의력이나 관심이나 충성심에게서 인간은 인간에 대한 태도와 관련한 뭔가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대화할 때 상대에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이라든가..) 고양이는 개에 비하면 한참 신참이다. 그래서 아직 거리가 있다. 물론 개와는 다른 과의 고양이 특유의 기질 또한 꽤나 완고하게 유지될 것이다. 그게 매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이탈리아 나폴리 태생의 '얼굴 없는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자신의 글쓰기를 이야기하면서 '프란투말리아frantumaglia'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알려준 단어인데, 머릿속에서 온갖 파편들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인간(의 정신)을 이야기하는 원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자신의 작품에서도 어느 순간 주인공의 정신이 어떤 사건에 직면해 일순간 해체되는 듯한 장면을 그린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엘레나 페란테와 같은 이탈리아 나폴리 태생의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의 작품 '신의 손'이라는 영화에도 중년 여성이 믿었던 남편의 외도에 대한 배신감에 화가 치밀어 올라 주체할 수 없을 때, 주방에서 저글링을 하며 마음을 추스르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악 물고 흐느끼면서 오렌지 세 개를 곡예사처럼 던지고 받고를 계속한다. 나는 삶을 이렇게 형상화할 수도 있구나 싶어 울면서 감탄했다.
인간(의 정신)은 봉제 인형 같다. 내용물을 천으로 싸서 바느질로 잘 꿰맸을 때 형체가 유지된다. 어느 한쪽의 실밥이 튿어지거나 하면 얼마 가지 않아 해체되다시피 한다. 엘레나 페란테는 글쓰기가 바로 반복되는 내면의 균형과 불균형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오늘 숲에서 딱따구리를 봤다. 작은 녀석이었다. 과감하게도 멀지 않은 곳에서 눈에 띄는 나무에서 자리를 옮겨 가며 여러 군데를 부리로 파보더니만 내게 충분히 살필 수 있는 시간을 준 뒤에 훌쩍 숲속으로 날아갔다. 주머니의 폰카를 꺼내 동영상을 담으려다가 보고만 있었는데 아쉽지 않다.
오늘 하늘 빛깔이 참 곱다. 우수아이아 민박집 거실 창 너머로 봤던 하늘이 떠오른다. 그때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도 내겐 더없는 선물이다. 도시로 시야가 가려지고 좁혀지고 눈이 멀기 전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자연의 풍광이라는 선물을 좀 더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박수 효과와 군중 심리가 만났을 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평균 하향화의 미끄럼틀을 타게 된다. 무슨 말인가.
어떤 것을 봤을 때 너무 쉽게 판단하면 그르치기 쉽다. 공연장이나 연주장에서, 특히 클래식 연주회에서 곡이 끝나고 누군가가 맨 먼저 박수를 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이 박수에 합세하는 것을 본다. 어떤 심리에선가 누군가는 남보다 먼저 어떤 행동에 나서는 경우가 있고(꼭 있다), 남이 하면 (안도하고) 따라하는 좀더 많은 수의 사람이 있다. 이 둘이 만나 함께 작용하면 성급한 판단과 집단적인 행동이 전체를 휩쓰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에 반해 제대로 된 진정한 리뷰는 시간을 두고 나온다. 앞에서 먼저 박수를 치는 행위나, 따라 치는 행위는 큰 수고(비용)가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내키는 대로 부담 없이 쉽게 감행하고 그러다 보면 남발한다. 반면 리뷰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수고를 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애정과 감동의 깊이에 비례해서 나오는 의식적인 행위다. 작품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깊이 생각한 끝에 나오는 공들인 평가일 수밖에 없다. 그런 평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됐을 때는 저마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플랫폼의 문제는 너무나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 모든 것을 즉시 순식간에 (누군가, 뒤이어 모두가) 평가(라기보다는 즉석 반응)하고 공유하게(말 그대로 퍼나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는 뒤로 밀려나고, 사람들은 그런 문화에 젖게 되면서 전반적인 안목이 피상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의 조각들이 소용돌이를 일으킨 아침. 내 머릿속도 프란투말리아, 그것이다. 글로 한땀한땀 봉합해 둔다. 떠올랐다 흩어져 사라지려는 생각을 서둘러 글이라는 잠자리채로 채집해 고속냉동으로 응결시키는 작업을 한 셈이다. 그만큼 아주 조금 세상에 뭔가가 또 추가되고 누적되었다. 글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봉제 인형 같다. 내용물을 천으로 싸서 바느질로 잘 꿰맸을 때 형체가 유지된다. 어느 한쪽의 실밥이 튿어지거나 하면 얼마 가지 않아 해체되다시피 한다. 엘레나 페란테는 글쓰기가 바로 반복되는 내면의 균형과 불균형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오늘 숲에서 딱따구리를 봤다. 작은 녀석이었다. 과감하게도 멀지 않은 곳에서 눈에 띄는 나무에서 자리를 옮겨 가며 여러 군데를 부리로 파보더니만 내게 충분히 살필 수 있는 시간을 준 뒤에 훌쩍 숲속으로 날아갔다. 주머니의 폰카를 꺼내 동영상을 담으려다가 보고만 있었는데 아쉽지 않다.
오늘 하늘 빛깔이 참 곱다. 우수아이아 민박집 거실 창 너머로 봤던 하늘이 떠오른다. 그때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도 내겐 더없는 선물이다. 도시로 시야가 가려지고 좁혀지고 눈이 멀기 전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자연의 풍광이라는 선물을 좀 더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박수 효과와 군중 심리가 만났을 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평균 하향화의 미끄럼틀을 타게 된다. 무슨 말인가.
어떤 것을 봤을 때 너무 쉽게 판단하면 그르치기 쉽다. 공연장이나 연주장에서, 특히 클래식 연주회에서 곡이 끝나고 누군가가 맨 먼저 박수를 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이 박수에 합세하는 것을 본다. 어떤 심리에선가 누군가는 남보다 먼저 어떤 행동에 나서는 경우가 있고(꼭 있다), 남이 하면 (안도하고) 따라하는 좀더 많은 수의 사람이 있다. 이 둘이 만나 함께 작용하면 성급한 판단과 집단적인 행동이 전체를 휩쓰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에 반해 제대로 된 진정한 리뷰는 시간을 두고 나온다. 앞에서 먼저 박수를 치는 행위나, 따라 치는 행위는 큰 수고(비용)가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내키는 대로 부담 없이 쉽게 감행하고 그러다 보면 남발한다. 반면 리뷰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수고를 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애정과 감동의 깊이에 비례해서 나오는 의식적인 행위다. 작품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깊이 생각한 끝에 나오는 공들인 평가일 수밖에 없다. 그런 평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됐을 때는 저마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플랫폼의 문제는 너무나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 모든 것을 즉시 순식간에 (누군가, 뒤이어 모두가) 평가(라기보다는 즉석 반응)하고 공유하게(말 그대로 퍼나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는 뒤로 밀려나고, 사람들은 그런 문화에 젖게 되면서 전반적인 안목이 피상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의 조각들이 소용돌이를 일으킨 아침. 내 머릿속도 프란투말리아, 그것이다. 글로 한땀한땀 봉합해 둔다. 떠올랐다 흩어져 사라지려는 생각을 서둘러 글이라는 잠자리채로 채집해 고속냉동으로 응결시키는 작업을 한 셈이다. 그만큼 아주 조금 세상에 뭔가가 또 추가되고 누적되었다. 글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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