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이 날 때 끝이 나는 것

더드미
2025-04-21 08:23

체력단련장에서 두 어르신이 대화를 한다. 두 분은 구면이다. 이곳에서 오가며 알게 된 사이인 모양이다.
조금 더 연배가 있어 보이는 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당신 몇 년생이지?"
잠시 뜸을 들이나 싶더니 답을 한다.
"53년생."
"나보다 세 살 밑이네."
두 분 다 칠순이라는 말 아닌가. 듣고 있던 내가 맘속으로 화들짝 놀란다. 그 정도 고령인 줄은 짐작 못했기 때문이다.
꽃할배가 따로 없다. 하기야 이런 체력단련장을 부지런히 다니는 분들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저속 노화형'일 테니 신체 연령도 호적상의 나이와는 따로 작동할 것이다.
두 칠순 청년의 대화가 이어진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잠이 깨니까 왔지. 일찍 깨면 일찍 오고, 늦게 일어나면 늦게 오고..."
"나이가 들수록 잠이 줄어."
"점점 일찍 깨게 되는 것 같아. 무료하니까 나와서 운동이나 하는 거지."
아니다. 내가 보기엔 '운동이나 하는' 정도가 아니다. 무지하게 열심히들 한다.
일찍 나와서 몇 시간씩 이곳에서 시간을 들여 운동을 한다. 칠순처럼 보이지 않는 건강의 비결이다.
노욕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 그래야 잔병치레를 하지 않고 다치지 않을 수 있다.
이 분들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오래 살려고'가 아니라 '건강하게 살다 가려고' 운동을 한다는 거다.
또 대화가 이어진다.
"왜 근력 운동만 그렇게 열심이야?"
"할리를 타려면 이렇게 해야 해요."
할리? 이어지는 대화를 들어 보니 저 육중하게 멋들어진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말하는 모양이다.
"팔과 다리에 힘이 없으면 오토바이가 넘어져요. 제대로 탈 수가 없어요."
"맞아. 나이가 들어서 운동하면 근육량은 늘진 않아. 단단해질 수는 있어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미국 프로야구 선수이자 감독 요기 베라가 한 명언으로 알려져 있다. 명언 맞다.
그는 9회말 투 아웃 풀 카운트 상황에서도 역전극이 펼쳐질 수 있는 야구의 묘미를 말한 것이겠지만,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야구보다 연극으로 바꿔 생각해 볼 때가 많다.
연극은 막이 내려갈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대단원이라는 말처럼, 오히려 맨마지막 결말에 의해서야 그 앞의 모든 것들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 때야 비로소 배우들은 가슴 벅찬 표정으로 피날레 인사를 하고 무대를 떠날 수 있고,
관객들은 감동에 차서 뜨거운 박수와 환호로 화답하고, 끝내 배우들을 다시 불러낸다. 앵콜, 앵콜...

인생도 한 편의 연극이다.
마지막 무대를 떠날 때까지 모든 것은 연속적이고 또 그 다음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잠정적이고 불확정적이다.
그러니 지금 순간 너무 들뜨거나 상심하기보다 늘 언젠가 닥칠 마지막 내 모습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지금 이 순간도 그것을 향하고 그것에 기여하고 공헌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마지막은 10년 후일 수도 있지만, 내일일 수도 있고 오늘 오후일 수도 있다.
그러니 순간순간 세상의 최선을 찾고 누리고 나누고, 그러기 위해 자신의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만고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

오늘 저녁 교황이 선종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떴다.
이런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을 들었던 프란치스코 교황. 얼마 전 투병 끝에 호전되어 감사 인사를 전하던  모습이 선한데, 결국 88세로 이 곳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더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알기로 그는 성실한 배우였고 막이 내릴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많은 이들이 마음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문득 김수환 추기경의 두 권짜리 전기를 읽고 가톨릭 사제를 달리 보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다시 열릴 것이다. 그전까지 콘클라베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투표지를 태우는 연기로만 안쪽 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의아했다. 영화 <콘클라베>를 보니, 얼마나 사실에 기반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 과정 역시도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인간들의 일이고 정치의 세계였다.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교황은 누가 될까. 누가 되든 끝까지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배우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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