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하고도 분명한 단상
2025-04-23 00:16
유명한 폐가의 벽 한 켠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싶다.
몇 년 전 쯤, 한참 ‘심야괴담회’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인기를 막 끌던 때에 소개 된, 어느 사연 속 배경이 된 폐가이다. 나는 무료할 때 이 방송을 라디오처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여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동안 공포를 느끼리라는 기대감에 서로 숨을 죽여가며 ‘무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다가 실제로 어느 비슷한 순간에 함께 오싹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흥미롭고 재밌기 때문이다. 이 폐가가 등장하는 사연은 특히나 재밌게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폐가의 분위기가 한 눈에도 위험해보였다는 세세한 묘사들을 듣는동안, 단지 버려진 집 하나가 그렇게나 무섭다면 정말 뭔가가 있을 수 있지 않나 하는 궁금증이 돋아났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연을 다 듣고 그 폐가가 실제론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았다. 어느 사람이 ‘방송에 나온 그 폐가’라며 다녀와봤다는 영상을 올린 유튜브 링크를 찾을 수 있었다.
조회수도 얼마 없었고, 애초에 유튜브를 운영하는 사람도 아닌 듯 한데 어쩌다 다녀와본 김에 찍어 올린 듯한 날것의 영상이었다. 영상을 찍은이가 대낮에 다녀온지라 무섭지도 않았고 오히려 허물어져가는 콘크리트 건물 주변에 풀이 무성하여 그 주변으로 뽀송하게 햇빛이 드는 신비로운 느낌이 있었다. 이런 폐가에서 괴담이 생겨난다는 사실 보다도, 사연이 유명해지니 누군가는 또 다른 불특정한 타인이 볼지도 모를 영상을 찍어 올려두고, 그것을 바로 내가 찾아 보게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폐가 탐방 영상을 찾아서 보고있나..’ 하는 생각을 하던 중,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에 묘하게 오래 머무르게 된 장면을 보았다.
사연이 방송을 타고 공개 된 후 그 사이에 사람들이 담력훈련을 다녀갔는지 소주병이 바닥에 굴러다니거나 누가 언제 다녀갔다는 낙서들이 있다고 설명하며 내부를 찬찬히 비추던 카메라가 어느 벽면에서 멈추었다. 영상을 찍은 사람이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켜가며 빨간 스프레이로 휘갈겨 적혀있던 글을 읽었다.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없어지지 아니하며
항상 이기나니
죽더라도 거짓되지 말라
영상을 찍던 이가 ‘음.. 무슨 얘긴지..’ 라며 카메라를 갸웃 갸웃 흔들다가 다시 시점을 전환했다. 이 투박한 영상에 5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담긴 문구가 마치 외계인이 먼 우주에서부터 기약없이 쏘아보낸 신호를 우연히 마주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누가 이런 글을 쓰러져가는 버려진 벽에 적었을까? 나는 이 문구에서 무엇을 발견했다고 여기길래 감명을 받게 된 것일까?
이 문장은 얼핏 보면 허황되기도 하고 지나칠 정도로 거룩하기도 하다. 가르침을 전하려는 것이 분명한 문장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과연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오늘 날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네 줄 짜리 문장이 놀라우리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 뜻에 대해서는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은 참고할만 하나 어떤 면은 반박하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문장에 대한 이해나 뜻과 상관없이 심장을 통해 어떤 신호 같은 것을 받은 게 분명하다고 여기고 있다.
알고보니 이 문장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 글이었다. 도산 선생이 흥사단을 조직한 뒤에, 동지들과 대화하거나 전한 가르침들 중 이런 문장이 있다더라 하고 알려진 것들 몇가지가 뒤섞인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라는 문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위인이 남긴 말이라고 여기자면 그의 시대를 염두에 두게 되고, 그러면 이 문장에 결연한 소망과 의지가 담겨 있으리라는 짐작을 하더라도 과장인 면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동받게 될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기원을 파고 들지 않더라도, 단지 폐가의 한 벽에 스프레이로 성의 없이 휘갈긴 글씨로 발견된 순간 탓에 심장이 수런거리게 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굳이 적은 이는, 사람들이 장난삼아, 시험삼아, 만용삼아 무단으로 들락거리는 폐가의 한 벽에 누가 그 글을 마주치고 읽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적은 것일까? 어디서 우연히 접한 문장이 심금을 울려 삶의 의미를 더해준다던지, 좌우명으로 삼게 된다던지 하는 일은 많을 테지만 남들처럼 폐가에 침입해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는 순간에 하필이면 이 문장을 적자고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였던 걸까?
이 문장이 여전히 일상에서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러면 내가 문장의 내용을 실천하려 하는 것 조차 아님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용기같은 것이 샘솟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폐가의 벽에 여전히 남겨져 있을, 혹은 이제는 벽과 함께 철거되었을지도 모르는 글씨를 5초 남짓의 낯선이의 영상에서 마주한 순간 어떤 축언과 같은 힘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 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미지의 믿음을 목격한 기분이 들었던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쯤, 한참 ‘심야괴담회’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인기를 막 끌던 때에 소개 된, 어느 사연 속 배경이 된 폐가이다. 나는 무료할 때 이 방송을 라디오처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여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동안 공포를 느끼리라는 기대감에 서로 숨을 죽여가며 ‘무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다가 실제로 어느 비슷한 순간에 함께 오싹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흥미롭고 재밌기 때문이다. 이 폐가가 등장하는 사연은 특히나 재밌게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폐가의 분위기가 한 눈에도 위험해보였다는 세세한 묘사들을 듣는동안, 단지 버려진 집 하나가 그렇게나 무섭다면 정말 뭔가가 있을 수 있지 않나 하는 궁금증이 돋아났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연을 다 듣고 그 폐가가 실제론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았다. 어느 사람이 ‘방송에 나온 그 폐가’라며 다녀와봤다는 영상을 올린 유튜브 링크를 찾을 수 있었다.
조회수도 얼마 없었고, 애초에 유튜브를 운영하는 사람도 아닌 듯 한데 어쩌다 다녀와본 김에 찍어 올린 듯한 날것의 영상이었다. 영상을 찍은이가 대낮에 다녀온지라 무섭지도 않았고 오히려 허물어져가는 콘크리트 건물 주변에 풀이 무성하여 그 주변으로 뽀송하게 햇빛이 드는 신비로운 느낌이 있었다. 이런 폐가에서 괴담이 생겨난다는 사실 보다도, 사연이 유명해지니 누군가는 또 다른 불특정한 타인이 볼지도 모를 영상을 찍어 올려두고, 그것을 바로 내가 찾아 보게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폐가 탐방 영상을 찾아서 보고있나..’ 하는 생각을 하던 중,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에 묘하게 오래 머무르게 된 장면을 보았다.
사연이 방송을 타고 공개 된 후 그 사이에 사람들이 담력훈련을 다녀갔는지 소주병이 바닥에 굴러다니거나 누가 언제 다녀갔다는 낙서들이 있다고 설명하며 내부를 찬찬히 비추던 카메라가 어느 벽면에서 멈추었다. 영상을 찍은 사람이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켜가며 빨간 스프레이로 휘갈겨 적혀있던 글을 읽었다.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없어지지 아니하며
항상 이기나니
죽더라도 거짓되지 말라
영상을 찍던 이가 ‘음.. 무슨 얘긴지..’ 라며 카메라를 갸웃 갸웃 흔들다가 다시 시점을 전환했다. 이 투박한 영상에 5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담긴 문구가 마치 외계인이 먼 우주에서부터 기약없이 쏘아보낸 신호를 우연히 마주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누가 이런 글을 쓰러져가는 버려진 벽에 적었을까? 나는 이 문구에서 무엇을 발견했다고 여기길래 감명을 받게 된 것일까?
이 문장은 얼핏 보면 허황되기도 하고 지나칠 정도로 거룩하기도 하다. 가르침을 전하려는 것이 분명한 문장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과연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오늘 날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네 줄 짜리 문장이 놀라우리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 뜻에 대해서는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은 참고할만 하나 어떤 면은 반박하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문장에 대한 이해나 뜻과 상관없이 심장을 통해 어떤 신호 같은 것을 받은 게 분명하다고 여기고 있다.
알고보니 이 문장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 글이었다. 도산 선생이 흥사단을 조직한 뒤에, 동지들과 대화하거나 전한 가르침들 중 이런 문장이 있다더라 하고 알려진 것들 몇가지가 뒤섞인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라는 문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위인이 남긴 말이라고 여기자면 그의 시대를 염두에 두게 되고, 그러면 이 문장에 결연한 소망과 의지가 담겨 있으리라는 짐작을 하더라도 과장인 면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동받게 될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기원을 파고 들지 않더라도, 단지 폐가의 한 벽에 스프레이로 성의 없이 휘갈긴 글씨로 발견된 순간 탓에 심장이 수런거리게 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굳이 적은 이는, 사람들이 장난삼아, 시험삼아, 만용삼아 무단으로 들락거리는 폐가의 한 벽에 누가 그 글을 마주치고 읽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적은 것일까? 어디서 우연히 접한 문장이 심금을 울려 삶의 의미를 더해준다던지, 좌우명으로 삼게 된다던지 하는 일은 많을 테지만 남들처럼 폐가에 침입해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는 순간에 하필이면 이 문장을 적자고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였던 걸까?
이 문장이 여전히 일상에서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러면 내가 문장의 내용을 실천하려 하는 것 조차 아님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용기같은 것이 샘솟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폐가의 벽에 여전히 남겨져 있을, 혹은 이제는 벽과 함께 철거되었을지도 모르는 글씨를 5초 남짓의 낯선이의 영상에서 마주한 순간 어떤 축언과 같은 힘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 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미지의 믿음을 목격한 기분이 들었던지도 모르겠다.
댓글
괴담은 무엇보다 사람의 비상한 주의를 끄는 장치로서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괴담이 괴담으로 소비되는 데 그치지만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