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환한 아침

더드미
2025-04-23 07:00

#면피성 예의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의례적인 인사인데도 어떤 사람의 그것은 허투루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경우가 있다.
어린 아이가 처음 보는 어른에게도 깍듯이 배꼽 인사를 하는 걸 봤을 때 부모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때가 있지만, 다 큰 어른이, 그것도 나보다 연배가 (적어도 그렇게) 낮아 보이지도 않는 성인이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볼 때는 밀려드는 감동이 더 크다. 오늘 아침에 만난 분이 그랬다.
왜 그런 인사를 받았을 때 놀라게 되나.
요즘은 예의 바른 예의, 선심성 예의, 시혜성 예의, 호객성 예의, 계산적 예의 같은 것에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나 공감이나 교감도 그런 노력도 없는 예의.
사실 교과서적으로 생각하면, 인사를 할 때나 감사를 표시할 때나 양해를 구할 때 무엇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우선이다. 선의나 호의를 베풀 때도 그것이 상대에게 제대로 가 닿는지를 배려해야 옳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기 방어나 자기 정당화나 자기 충족이나 여유의 과시로 흐르기 쉽다.
인사를 할 때도 비스듬히가 아니라 반듯이 상대를 향한다거나, 얼굴을 마주한다거나 눈을 마주친다거나.
겉치레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사람들은 알아본다. 모른 척할 뿐이다. 반복되면 으레 그러려니 한다.
오래 전에 안동 도산 서원에 견학을 갔을 때의 일이다. 퇴계 집안의 종손 어른이 젊은 방문객들을 맞아 종갓집 툇마루에서 깎듯이 반절을 하며 인사하는 모습에 거의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책에서만 읽었던 선비의 예, 공경이란 그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새 잊고 있었다. 일깨워준 아침의 그분에게 마음의 절을 올린다.

#출판publishing
어제 출판을 두고 이야기할 일이 있었다. 준비를 하면서 든 생각의 얼개를 메모라도 해둘 필요를 느낀다. 더 다듬어야 한다.
출판은 영어로 publish다. 의미는 make public이다. public의 어원은 라틴어로 publicus이고 populus에서 왔다. 영어로 people을 뜻한다. people은 어느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사람들, 민중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것이 되도록 하는 것, 모든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 출판의 본래 의미다. 무엇을? 사람의 생각(idea), 의견(opinion). 그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개인이 알게 된 것이나 떠올린 새로운 좋은 생각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 좋다는 선물 공동체의 정신과 관련이 있다. 그것이 지속되도록 기여하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공동체가) 먹여 살려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선물로 보답하게 마련이다.
지금은 출판도 사업이고 장사가 되었다. 출판물(책)도 상품으로 판매된다. 과거 각자의 필요한 노동(수고)의 교환과 그에 대한 보답이 경제 활동이었다면, 이제는 노동의 산물이 일정하게 평가된 가치를 띠고 독립적으로 유통된다. 서로에 대한 도움의 주고받음으로서의 인간의 관계는 사라지고 상품이 인간을 지배한다.
활동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런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순환할 수 있도록 사례하는 것과, 상품을 값으로 사고 파는 것은 다르다.
오늘날 모든 것이 사유화되고 상품으로 거래되고 가격으로 매겨지고 이윤을 남겨야 하는 세계에서 본질적으로 공적 가치를 추구하고 베풀고 보답을 받는 활동이었던 출판이 겪게 되는 곤혹과 괴로움은 거기서 나온다.

#관종에 관한 생각
남의 눈, 남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부류를 관종이라고 한다. 그것은 개인 차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집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많이 그런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마치 만년 사춘기에 있는 것처럼. 사춘기는 남의 시선에 민감할 때다.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을 바깥의 평가로 무마하려 한다. K로 시작되는 국제적 평가에 대한 과민, 국격이란 말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을 보면 그렇다. 국제 사회에서 약소국으로서의 고통과 오랜 설움의 반작용일까?
자신에 대한 정직과 겸허, 요란하지 않은 자부심, 과시하지 않는 자족 같은 것이 느껴지는 나라, 민족, 집단, 사람도 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동백꽃
비온 후 동백꽃이 화알짝 폈다.
붉디 붉은 아이 주먹만 한 꽃송이 속에 노란 꽃술이 선명하다.
유난히 동백꽃을 좋아하는 작은 새가 동박이다.
아직은 추운 날씨에 피는 꽃을 위해 벌 대신 꽃가루를 묻혀 나르는 배달부가 되는 기특한 새.
선운사의 동백꽃은 이미 환하겠지.

#얼굴의 주름
나는 가톨릭 신자도 아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미소 띤 얼굴이 좋다.
얼굴을 보면 분명 좋은 사람일 것 같다.
물론 얼굴과 행실이 딴판인 사람도 많다.
하물며 외모나 이미지를 얼마든지 고칠 수도 연출할 수도 있는 시대임에랴.
모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나름의 결함으로 얼룩져 있고 삐걱대고 자책하고 씨름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애써 더 서로 연민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코는 평생 그렇게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 증거일 연민과 사랑의 얼굴, 나도 그렇게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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