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은 구름 같아서
2025-04-25 07:23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던 중에 글쓰기를 두고 어느 분이 doing과 being의 차원으로 구분했다. 앞의 것이라면 기계의 도움을 받거나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뒤의 것이라면 자신이 해야만 한다. 좋은 구분이다. 그런데 being보다 becoming으로 보면 어떨까. 글쓰기는 존재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활동, 즉 being의 차웡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자신을 형성해가는, 어떤 존재로 되어 가는 활동, 즉 becoming의 차원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인간 존재를 정적이고 고착적인 being으로 보기보다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이고 지향적인, 그래서 (그 뒤가 계속 궁금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becoming으로 보는 게 나은 것 같다. becoming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doing이기도 하다.
정신은 구름 같다. 모였다 흩어졌다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갖가지 형체를 만들었다 해체했다 한다. 그러는 중에도 자주 반복되는 꼴이 있다. 그게 그만의 영혼, 혹은 자신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익숙한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인류는 문물(文物, 문서와 물건)을 만들고 구축해 왔다. 문물이란 쉽게 비유하자면 건물과 문서(기록과 계약)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바꿔 말할 수도 있다.) 건물이 없으면 문서도 안전할 수 없기에 우선 확보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문서가 없는 건물은 공허하다. 사실은 문서에 적힌 어떤 의도와 계획에 따라 건물을 짓고, 문서의 내용을 수행하고 보전하기 위해 그만큼 건물을 잘 지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건물보다 중요한 게 문서다. 법원 청사가 중요한지 법이 중요한지만 따져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건물 짓기를 기계에 맡기기 시작했다. 이제 문서 작성도 건물처럼 기계(배후의 소수)의 손에 맡기려 한다. 기술의 진보라고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걸까.
산책은 발이 하는 일 같지만 사실은 오감이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의 호사라 할 수 있다. 천변이나 숲길을 걷는 동안 눈은 머리 위 하늘부터 밭밑 땅, 그리고 시시각각 펼쳐지는 사방의 풍경을 살핀다. 요즘처럼 초목의 푸른 빛이 밝고 맑은 연두에서 조금씩 색을 짙게 더한 녹색으로 바뀌어 가는 때엔 눈이 삼림욕을 한다. 실제로 시력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덩달아 심리적 안정에도 좋다고 한다. 녹색은 다른 색에 비해 빛을 반사하기보다 흡수하는 편이기 때문에 보는 눈의 에너지 소모도 적어 편하게 느낀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머리로 알기 전에 이미 내 눈은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몸에서 눈이 가장 귀족 같은, 아니 심지어 신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이론을 뜻하는 theory는 본래 보다, 관조하다를 의미하는 theoria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는데, 그 어원이 그리스어로 신을 뜻하는 theos다. 눈으로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야말로, 마치 하늘 위에서 신이 모든 것을 내려다 보는 호사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책은 눈이 두 발 위에 올라 신처럼 세상을 속속들이 핥고 음미하는 향연인 셈이다. (쓰고 보니 눈이 주인공이 되었는데, 인간의 감각 중에 시각의 비중이 80%에 이른다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사실은 청각이 산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작지 않다. 특히 요즘처럼 이른 아침 갖가지 새소리가 노래할 때는 더더욱)
정신은 구름 같다. 모였다 흩어졌다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갖가지 형체를 만들었다 해체했다 한다. 그러는 중에도 자주 반복되는 꼴이 있다. 그게 그만의 영혼, 혹은 자신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익숙한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인류는 문물(文物, 문서와 물건)을 만들고 구축해 왔다. 문물이란 쉽게 비유하자면 건물과 문서(기록과 계약)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바꿔 말할 수도 있다.) 건물이 없으면 문서도 안전할 수 없기에 우선 확보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문서가 없는 건물은 공허하다. 사실은 문서에 적힌 어떤 의도와 계획에 따라 건물을 짓고, 문서의 내용을 수행하고 보전하기 위해 그만큼 건물을 잘 지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건물보다 중요한 게 문서다. 법원 청사가 중요한지 법이 중요한지만 따져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건물 짓기를 기계에 맡기기 시작했다. 이제 문서 작성도 건물처럼 기계(배후의 소수)의 손에 맡기려 한다. 기술의 진보라고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걸까.
산책은 발이 하는 일 같지만 사실은 오감이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의 호사라 할 수 있다. 천변이나 숲길을 걷는 동안 눈은 머리 위 하늘부터 밭밑 땅, 그리고 시시각각 펼쳐지는 사방의 풍경을 살핀다. 요즘처럼 초목의 푸른 빛이 밝고 맑은 연두에서 조금씩 색을 짙게 더한 녹색으로 바뀌어 가는 때엔 눈이 삼림욕을 한다. 실제로 시력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덩달아 심리적 안정에도 좋다고 한다. 녹색은 다른 색에 비해 빛을 반사하기보다 흡수하는 편이기 때문에 보는 눈의 에너지 소모도 적어 편하게 느낀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머리로 알기 전에 이미 내 눈은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몸에서 눈이 가장 귀족 같은, 아니 심지어 신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이론을 뜻하는 theory는 본래 보다, 관조하다를 의미하는 theoria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는데, 그 어원이 그리스어로 신을 뜻하는 theos다. 눈으로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야말로, 마치 하늘 위에서 신이 모든 것을 내려다 보는 호사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책은 눈이 두 발 위에 올라 신처럼 세상을 속속들이 핥고 음미하는 향연인 셈이다. (쓰고 보니 눈이 주인공이 되었는데, 인간의 감각 중에 시각의 비중이 80%에 이른다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사실은 청각이 산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작지 않다. 특히 요즘처럼 이른 아침 갖가지 새소리가 노래할 때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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