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숲에 내리는 별빛

더듬이
2025-04-30 07:36

문자가 날아들었다. 부고다. 후배(친구에 가까운)의 부친상이다. 빈소가 전주다.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지만 속이 깊어 마음에 두고 가끔 생각해온 친구다.
가야 한다.
이 친구를 함께 알고 있는 또 다른 후배(좀더 친구에 가까운)한테서 곧이어 문자가 날아든다.
"오늘내일 다른 일들도 있고, 거기까지 멀기도 해서 미안하다고 문자 보내고 계좌이체로 부조만 했어."
마음 한구석의 미안함이 행간에 다분하다.
그 친구에게 보내는 문자도 그랬겠지만, 내게 보내는 문자로도 그 석연찮은 마음의 앙금을 어떻게든 씻어내려는 것 같다.
이해한다. 나도 그럴 때가 많으니까.
전화를 건다. "특별히 급한 일 아니면 저녁에 갔다 오는 게 어때?"
이런저런 사정을 토로한다.
"그래, 무리할 건 없어. 생각해 보고 전화 줘."
잠시 후 다시 연락이 왔다.
"당신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아내가 그러더라고 했다.
전화 속 목소리는 오히려 한결 개운해진 것 같다.
저녁 7시 반 함께 출발했다.
10시가 다 되어 도착한 대학 병원 장례식장의 넓직한 특실은 폐점 시간의 가게처렴 한산했다.
상조회에서 용역으로 보내준 봉사자들도 10시면 퇴근이라고 했다.
요즘은 조문객들도 늦게까지 머무르진 않는 것 같다.
"남은 일 잘 치르고, 건강 잘 챙겨."
"네, 서울에 가서 연락 드릴게요. 조심해서 올라 가세요."
가는 길 오는 길, 까만 밤 속 차 안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지루하다거나 피곤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세 사람 사이에 또 하나의 공통 분모가 생기는 것 같았다.

다들 바빠서 빠지고 미룬다.
결국엔 무엇을 위해 바쁜 걸까.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미뤄야 하는 걸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이 좋은 삶일까. 결국 현실적으로는 시간 사용에서 우선 순위의 현명한 배열로 귀결된다.
비상금이 떠오른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주머니나 어딘가에 따로 챙겨 두는 돈.
시간 주머니에도 그런 게 있다면.
주어진 시간의 100%를 미리미리 채워 가며 쓰기보다, 10-20% 정도는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무엇/누구를 위해 남겨 두는 거다.

의례에 관한 책을 읽고 난 후로, 종종 의례에 해당되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그 중 하나는 기도다.
가령, 먹을 것을 앞에 두면 마음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에 기도문 같은 것을 읊조리게 된다.
어릴 적 의례적으로 했던 식사 기도 때는 오히려 이런 마음을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빨리 감았던 눈을 뜨고 음식을 입에 넣기에 바빴으니까.
지금 왜 그런 기도의 마음을 새삼스레 떠올리게 되는 걸까.
내 앞에 오기까지 수고한 손길(애덤 스미스는 그마저 자선심이 아니라 자기이익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들어갔을 정성은 부인할 수 없다)을 향해서든, 아니면 지금 이 순간까지 이런 생을 허락하신 운명의 신을 향해서든... 암튼 분명 내가 아닌, 적어도 나만이 아닌 다른 많은 주체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이것이 가능했을 거라는 깨달음의 무게 때문이다.
서로 두 손을 마주 잡고 짧게라도 감사 기도를 드린 후 음식을 나누는 영화 속 가족의 모습,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분명치는 않지만 꼭 소리 높여 "잘 먹겠습니다"라고 한 뒤 수저를 드는 사람들, 그런 장면들도 떠오른다. (특정 종교나 신앙과 상관 없이 그런 감사의 표시를 드러내는 의례는 참 다정하고 사랑스러워 보여 좋다.)
그리고,
문득, 나눠 먹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먹을 것을 나눠 먹는다는 것 아닌가.
그럴 때 우리는 운명 공동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음악이 돌아온 후에도 내내 귓속에서 웅웅 울린다.
중학교 때 백일장에서 부상으로 받은 수필집 제목이 <내 영혼의 숲에 내리는 별빛>이었다.
책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제목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별빛처럼 내 영혼을 비추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그 이미지에 다시 불이 들어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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