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 영원에 머무른다는 것 (ver. 0.7)

찰수
2025-05-04 07:52

오랜만에 한 영화를 두 번 봤다. 역시나 좋은 작품은 반복해서 보게 되고, 두 번째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된다. 또 곱씹게 된다. 한 번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여운이 내 삶에 머문다. 다시 일상을 살면서도 문득 문득 그 작품이 절로 떠오르거나 불러내 반복해서 음미하고 감상하게 된다.
영화는 음악을 닮아서 시간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지나가면 되돌려 볼 수 없다. (물론 개인 기기로 동영상을 볼 땐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며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이 경우엔 그렇게 진지하게 느리게 오가며 감상하기보다 대개는 빠르게 감기용이나 건너뛰며 보는 식으로 사용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반면 책은 한 번에 이해를 못 했을 때나 흐름을 놓쳤을 때는 얼마든지 뒤로 갈 수도 있고 선뜻 알 수 없는 이유로 붙들거나 사로잡히거나 매료됐을 때는 그곳에 머무를 수도 있다.
그렇다. 머무른다는 점이 중요하다.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고 해서 그걸(감상을) 제대로 해냈다거나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최선의 순간은 작품이 구현하거나 지향하는 어떤 아름다운 질서나 형태 속에 조응해 합류하고 머무는 것이다. 그럴 때 내 영혼과 삶과 주변 세계가 그렇게 되고 싶고,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상태에 도달하고 그런 모습에 조금은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 같다. '~것 같다'라고 한 것은 그것이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또 미달할 것이고 실패할 것이고 상심할 것이고 심지어 좌절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나를 구원하는 뭔가가 나타나거나 나를 이끌 것이다. 어두운 밤에도 사방에 점점이 명멸하는 빛들처럼 그런 선의와 호의가 곳곳에 흩뿌려져 있음을 나는 지금까지 경험으로 안다. 이제 영화 제목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다.
나는 시간 속에서도 영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곳에 머물 때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빠져든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고, 음악을 들을 때도 그렇고,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그렇고, 사람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깊은 대화는 나선형을 그리며 어디론가 데려간다. (timeless의 순간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 펼쳐지는 삶으로서의 자신이 이를테면 한 편의 책, 영화, 그림, 조각이 되고 싶어 한다. 지나온 것을 계속해서 반추하고 고치고 그 다음 시나리오를 써나가고 또 연기한다. 그 중단 없는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상기하라. 그럼에도 인생을 반복되는 테이프처럼 사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딱한 일인가.)
우리는 시계로 분할된 시간 개념에 익숙하다. 그게 시간인 줄 안다. 하지만 그건 서로 간에 행동 통일을 위해 편의적으로 시간을 공간처럼 분할해 수량화한 것일 뿐이다.
시간은 삶이 펼쳐지는 바탕이다. 그 속에는 곳곳이 영원이 숨쉬고 있다. 마치 사막에 숨겨진 샘처럼. 그곳에 깊이 파고 들어 가면 들어갈 수록 시간의 깊이가 출현한다. 체험해 본 사람은 안다. 순간 속의 영원이 무엇인지. 같은 삶을 살아도 순간을 (가급적 많이) 영원처럼 사는 사람이 삶을 제대로, 그러니까 더 잘 사는 사람일 것이다.

선의란 좋음의 지향이다. 좋음을 좋아하고 추구한다는 뜻이다.
선의를 가진 사람은 그런 뜻을 가진 사람이다.
좋음을 좋아하고 추구한다면 당연히 좋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상황에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혼자서 독단에 빠지지 않고 좋음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지고 생각을 듣고 싶어 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기꺼이 배우려 한다. 좋은 대화의 즐거움과 기쁨은 거기서 나온다.

멧비둘기는 참 순하다.
숲길을 지나다닐 때마다 여러 새와 마주치지만, 대개는 민첩하게 달아나거나 안전거리 안으로 다가가면 표로롱 자리를 뜨거나 슬금슬금 피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통통하고 귀여운 멧비둘기들은 꽤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도 태연히 먹이를 쫓거나 제 볼일을 본다. 심지어 내 쪽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기도 한다. 오늘은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한 친구가 아주 발 가까이까지 다가오는 게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조심스레 상체를 내리고 쪼그려 앉아 병아리에게 하듯 손이라도 내밀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새가 오해를 할까 봐 가만히 부동 자세로 있었다. 같은 녀석과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내 손안으로 이끌 정도로 친해질 것만 같다. 다른 생명체(주체)의 호감을 산다는 것은 (최소한 적대적이거나 악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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