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
2025-05-07 07:10
을지로에 오랜만에 나갈 일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갔다.
역을 나서는 순간 올려다 본 하늘에 겹쳐 하얀 눈꽃을 풍성한 솜사탕처럼 머리에 인 가로수를 마주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요즘 사방에 벚꽃이 많다는 생각을 했는데 비슷하면서도 다른 꽃이 만발한 것 아닌가.
이팝나무다. 5월의 눈꽃 나무라는 찬사를 듣는.
산에서 본 적은 있지만 가로수에 이렇게 일렬로 심어 놓은 것을 보니 색다르다.
날씬하고 큰 키에 풍성한 꽃이 보는 눈을 시원하게 한다.
누군지 몰라도 가로수로 선택을 참 잘한 것 같다.
집에 돌아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10분간 바라보라는 미션을 담은 기사를 읽었다.
첨부된 고화질 그림을 스크린으로나마 줌인-아웃을 하며 유심히 뜯어봤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세세한 붓의 터치를 볼 수 있었다.
이젤에 놓인 캔버스 앞 고흐가 팔레트를 들고 붓을 가할 때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가 정신병동에 입원한 후,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에 그렸던 그림이다.
실제로 밤하늘의 보며 그린 실사가 아니라 그의 정신 속에 어른거린 장면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용틀임하는 나무와 종소리처럼 울려퍼지는 달과 별의 장렬한 빛은 그의 열망의 반영으로 읽힌다.
AI가 아무리 세밀하게 모방을 하고, 주문에 따라 기발한 그림을 출력한다고 해도 화가의 감동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작품의 제작 과정의 고뇌와 수고와 열망과 노력을 함께 생각하고 상상하고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감상이란 똑같이 공유하는 몸이 체험한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한 입체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AI는 그 과정을 결여한 채 결과물을 모방해서 보여줄 뿐이다. 그것을 두고 찬탄하는 것은 그만큼 감상과 이해의 깊이가 얕다는 말이 된다. 생성 AI의 예술이 우리의 (특히 대중) 문화를 박막 스크린처럼 얄팍하고 피상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는 거기에서 나온다.
나답게 하는 자리가 있고 그런 순간이 있다.
이런 예술 작품을 볼 때 나는 만족스러운 내가 된다.
바라는 나가 있고 현실의 나가 있다.
전자를 생각하며 들뜨고 기대로 부풀지만, 번번이 후자로 인해 실망하고 상심한다.
그럴 때 예술 작품은 열망과 현실의 간극을 메움으로써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한다.
열망이 헛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 용기를 주고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예술이 구원일 수 있다는 말은 그런 뜻으로 이해된다.
구원은 9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끝내기 홈런 같은 한방의 해결사가 아니다.
내가 길을 잃거나 힘을 잃고 쓰러지고 미끄러지고 추락하려 할 때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잠시 들어 올리고 중심을 잡게 하는 것이다. 다시 내 날개짓을 할 수 있도록 북돋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천사’라 부르며 마지막까지 애장한 파울 클레의 판화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가 떠오른다.)
그러니 우리는 자주 좋은 것(자연이든 예술이든)을 보고 듣고 겪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대화를 나누고 좋은 일을 함께 해야 한다.
역을 나서는 순간 올려다 본 하늘에 겹쳐 하얀 눈꽃을 풍성한 솜사탕처럼 머리에 인 가로수를 마주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요즘 사방에 벚꽃이 많다는 생각을 했는데 비슷하면서도 다른 꽃이 만발한 것 아닌가.
이팝나무다. 5월의 눈꽃 나무라는 찬사를 듣는.
산에서 본 적은 있지만 가로수에 이렇게 일렬로 심어 놓은 것을 보니 색다르다.
날씬하고 큰 키에 풍성한 꽃이 보는 눈을 시원하게 한다.
누군지 몰라도 가로수로 선택을 참 잘한 것 같다.
집에 돌아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10분간 바라보라는 미션을 담은 기사를 읽었다.
첨부된 고화질 그림을 스크린으로나마 줌인-아웃을 하며 유심히 뜯어봤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세세한 붓의 터치를 볼 수 있었다.
이젤에 놓인 캔버스 앞 고흐가 팔레트를 들고 붓을 가할 때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가 정신병동에 입원한 후,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에 그렸던 그림이다.
실제로 밤하늘의 보며 그린 실사가 아니라 그의 정신 속에 어른거린 장면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용틀임하는 나무와 종소리처럼 울려퍼지는 달과 별의 장렬한 빛은 그의 열망의 반영으로 읽힌다.
AI가 아무리 세밀하게 모방을 하고, 주문에 따라 기발한 그림을 출력한다고 해도 화가의 감동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작품의 제작 과정의 고뇌와 수고와 열망과 노력을 함께 생각하고 상상하고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감상이란 똑같이 공유하는 몸이 체험한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한 입체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AI는 그 과정을 결여한 채 결과물을 모방해서 보여줄 뿐이다. 그것을 두고 찬탄하는 것은 그만큼 감상과 이해의 깊이가 얕다는 말이 된다. 생성 AI의 예술이 우리의 (특히 대중) 문화를 박막 스크린처럼 얄팍하고 피상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는 거기에서 나온다.
나답게 하는 자리가 있고 그런 순간이 있다.
이런 예술 작품을 볼 때 나는 만족스러운 내가 된다.
바라는 나가 있고 현실의 나가 있다.
전자를 생각하며 들뜨고 기대로 부풀지만, 번번이 후자로 인해 실망하고 상심한다.
그럴 때 예술 작품은 열망과 현실의 간극을 메움으로써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한다.
열망이 헛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 용기를 주고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예술이 구원일 수 있다는 말은 그런 뜻으로 이해된다.
구원은 9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끝내기 홈런 같은 한방의 해결사가 아니다.
내가 길을 잃거나 힘을 잃고 쓰러지고 미끄러지고 추락하려 할 때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잠시 들어 올리고 중심을 잡게 하는 것이다. 다시 내 날개짓을 할 수 있도록 북돋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천사’라 부르며 마지막까지 애장한 파울 클레의 판화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가 떠오른다.)
그러니 우리는 자주 좋은 것(자연이든 예술이든)을 보고 듣고 겪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대화를 나누고 좋은 일을 함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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