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비의 운치

우중 산책.
비오는 날 이른 산책이 좋다.
우산을 들고 나갔지만 맞아도 좋을 정도의 가는 비가 오는 둥 마는 둥했다.
화창한 맑은 날이야 물론 좋지만 이런 정도의 흐린 날의 촉촉함은 그것대로 운치가 있다. (적어도 지금 내 기분엔 그렇다)
마음도 한결 차분해지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시시각각의 계절의 변화가 좋다.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문장 그대로다.
(다만 우리가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기후는 점점 더 빠르고 격렬해지고 있으며 그 화근을 사실상 그냥 두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런 날씨에도 새벽 운동을 나오는 사람은 더 반갑다.
마치 최후의 전선을 지키는 든든한 전우를 만나는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호전적인 표현일까.
(뭐, 전쟁도 대개는 평화 관리에 실패하거나 고의로 무너뜨리는 문제 많은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되지만, 정작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개는 자원해서라기보다 동원된 일반 병사들의 전우에 대한 사랑(이른바 전우애)이나 국민에 대한 의무감에서 전개된다는 보고도 있다. 극한 상황일수록 인간애도 강렬해진다.)

평소처럼 왔는데 체력단련장의 불이 꺼져 있다. 곳곳의 문도 열린 상태인 걸 보니 아직 사람들이 오기 전인 모양이다.
모처럼 혼자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에, 폰의 음악 앱을 열어 팻 매스니의 앨범 One Quiet Night을 틀어 놓고 운동을 시작했다.
몇 곡을 들었을까, 문이 열리더니 이른 시각 터줏대감인 어르신이 모습을 나타냈다. 주머니에선 으레 즐겨 들으시는 트롯곡이 흘러 나온다. 두 장르의 음악이 뒤엉키면서 기괴한 불협화음이 공간을 휘저었다. 얼른 내 폰의 곡을 껐다.
잠시였지만 호젓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비가 그쳤다.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