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들으며 차를 마시다가
2025-05-17 09:54
모처럼 인사동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찻집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곳이라는데 주인이 차를 손님 앞에서 직접 우려내 대접하는 곳이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밖에서 후두두둑 소나기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비에 옷이 젖을 염려라고는 없는 안전한 피신처 같은 곳에서 지붕이나 처마로 때리듯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것은 참 운치가 있다. 어릴 적 한옥집에선 여름마다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참 오랜만의 느낌이었다.
그냥 티백을 뜨거운 물에 잠시 담갔다가 홀짝이던 차에 익숙하다가, 느리디 느린 절차와 순서에 따라 차를 내리고 마시고 다시 내리고 마시고 하는 동안 일행이 서로서로 주고 받는 대화도 차향만큼 느리고 은은하게 스며들 듯 정겨웠다. 그런 것을 깊이라 할 수 있을까.
음식도 음미할 줄 알면 좋다. 차맛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음미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이나 미각에도, 아니 오감에 골고루 시간을 충분히 내주어야 한다. 차를 마신다는 것이 그저 차의 영양분 흡수라는 목표의 효율적 달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이 최종 목표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에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반드시 포함한다. 그렇게 해서 다는 도가 되고 예가 된다.
"우리 어디서 차 한 잔 할까?"라고 할 때는 차가 잔에 담기고 그것을 비우기 전까지의 시간을 함께하자는 뜻 아니던가.
"오늘은 누가 왔다 갔어?"
다섯 살짜리 딸 아이가 엄마(=찻집 여주인)에게 묻곤 한단다. 다섯 살짜리가. 아이도 단골 손님들을 오랫동안 봐 와서 웬만큼은 기억하기에 묻곤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아이 같지 않다. 사실 그렇다. 아이는 아이대로 소리 없이 사회 속으로 열심히 진입하고 있다. 나름의 사회성을 기르고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콩나물이 소리 없이 자라듯, 아이도 그렇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는다. 바로 나 자신이 그러면서 컸음에도.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겐 모든 게 배움의 소재이자 자기화의 재료라는 사실을 잊고 마구 대하고 아무거나 준다. 또 제 때 필요한 것을 잘 주지 않는다.
"엄마 나 힘들어."
"너만 그래? 엄마도 힘들어."
중학생 딸과 이런 말을 주고받을 때가 자주 있다고 한다.
그런 일상의 이야기를 건네는 분의 표정은 이야기 내용만큼 심각하거나 괴로워 보이진 않았다.
이제는 그런 일 정도로야 고개가 접히고 어깨가 처지지는 않을 만큼 엄마 맷집이 생겨서일 수도 있고, 그런 병가지상사 같은 일을 이런 자리에서 굳이 심각한 어조로 전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어른스러움의 표시일 수도 있겠지만, 전후로도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모녀가 그런 넋두리로나마 서로의 피곤한 마음을 살갑게 토닥일 수 있는 사이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 대화를 격의 없이 나눌 수 있는 딸과 엄마는 그런 엄마와 딸이 곁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요즘 아이들이 많이 힘들어 한다는 말을 뉴스에서도 주변에서도 많이 듣고 또 본다.
초경쟁 사회의 압력이 전방위로, 특히 점점 아래로 내려가다 못해 이제는 학교 안의 청소년까지 일찍부터 짓눌리게 되었으니.
그게 아니어도,
모두가 힘들다. 소설가 조지 손더스가 그런 말을 유난히 강조한 적이 있다. 누구나 말로 못다 할 자기 짐을 지고 간다고 했다. 그러니 누구를 보든 가급적 친절해야 한다고 어느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말했다.
모두가 힘들다. 다행스러운 것은 모두가 똑같이 동시에 같은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내가 힘들 때는 다른 누군가가 잠시 숨을 돌릴 여유가 있던가 힘을 낼 수 있는 형편이어서 (그렇지 않은데도 선의를 발휘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다 내가 좀 기운을 회복하고 숨을 쉴 만할 때가 되어 주변을 돌아볼라 치면 반드시 크고 작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늘 도움을 주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냥 티백을 뜨거운 물에 잠시 담갔다가 홀짝이던 차에 익숙하다가, 느리디 느린 절차와 순서에 따라 차를 내리고 마시고 다시 내리고 마시고 하는 동안 일행이 서로서로 주고 받는 대화도 차향만큼 느리고 은은하게 스며들 듯 정겨웠다. 그런 것을 깊이라 할 수 있을까.
음식도 음미할 줄 알면 좋다. 차맛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음미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이나 미각에도, 아니 오감에 골고루 시간을 충분히 내주어야 한다. 차를 마신다는 것이 그저 차의 영양분 흡수라는 목표의 효율적 달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이 최종 목표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에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반드시 포함한다. 그렇게 해서 다는 도가 되고 예가 된다.
"우리 어디서 차 한 잔 할까?"라고 할 때는 차가 잔에 담기고 그것을 비우기 전까지의 시간을 함께하자는 뜻 아니던가.
"오늘은 누가 왔다 갔어?"
다섯 살짜리 딸 아이가 엄마(=찻집 여주인)에게 묻곤 한단다. 다섯 살짜리가. 아이도 단골 손님들을 오랫동안 봐 와서 웬만큼은 기억하기에 묻곤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아이 같지 않다. 사실 그렇다. 아이는 아이대로 소리 없이 사회 속으로 열심히 진입하고 있다. 나름의 사회성을 기르고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콩나물이 소리 없이 자라듯, 아이도 그렇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는다. 바로 나 자신이 그러면서 컸음에도.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겐 모든 게 배움의 소재이자 자기화의 재료라는 사실을 잊고 마구 대하고 아무거나 준다. 또 제 때 필요한 것을 잘 주지 않는다.
"엄마 나 힘들어."
"너만 그래? 엄마도 힘들어."
중학생 딸과 이런 말을 주고받을 때가 자주 있다고 한다.
그런 일상의 이야기를 건네는 분의 표정은 이야기 내용만큼 심각하거나 괴로워 보이진 않았다.
이제는 그런 일 정도로야 고개가 접히고 어깨가 처지지는 않을 만큼 엄마 맷집이 생겨서일 수도 있고, 그런 병가지상사 같은 일을 이런 자리에서 굳이 심각한 어조로 전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어른스러움의 표시일 수도 있겠지만, 전후로도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모녀가 그런 넋두리로나마 서로의 피곤한 마음을 살갑게 토닥일 수 있는 사이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 대화를 격의 없이 나눌 수 있는 딸과 엄마는 그런 엄마와 딸이 곁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요즘 아이들이 많이 힘들어 한다는 말을 뉴스에서도 주변에서도 많이 듣고 또 본다.
초경쟁 사회의 압력이 전방위로, 특히 점점 아래로 내려가다 못해 이제는 학교 안의 청소년까지 일찍부터 짓눌리게 되었으니.
그게 아니어도,
모두가 힘들다. 소설가 조지 손더스가 그런 말을 유난히 강조한 적이 있다. 누구나 말로 못다 할 자기 짐을 지고 간다고 했다. 그러니 누구를 보든 가급적 친절해야 한다고 어느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말했다.
모두가 힘들다. 다행스러운 것은 모두가 똑같이 동시에 같은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내가 힘들 때는 다른 누군가가 잠시 숨을 돌릴 여유가 있던가 힘을 낼 수 있는 형편이어서 (그렇지 않은데도 선의를 발휘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다 내가 좀 기운을 회복하고 숨을 쉴 만할 때가 되어 주변을 돌아볼라 치면 반드시 크고 작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늘 도움을 주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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