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풍 지대 (ver. 0.6)
2025-05-21 07:22
무풍 지대.
말 그대로 바람이 없는 지대다. 바람이 불지 않거나 극히 미미한 곳.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다. 공기는 압력 차이, 즉 기압의 차이에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풍 지대는 그런 공기의 이동이 (거의) 멈춘 곳이다.
적도 해양에 그런 지대가 있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그런 무풍 지대 이야기가 등장한다. 옛날 돛으로 항해를 하던 범선 시대에는 이 해역에 배가 진입하면 빠져나오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바람이 유일한 동력원이었으니까. 덥고 습한 바다 위를 표류하며 맴돌다 자칫 고깃밥이 될 수도 있었다.
오늘 아침 동네 숲이 그랬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이른 아침의 상쾌함은 온 데 간 데 없다. 신기하게도 이맘때면 숲을 가득 채우던 새 소리조차 잠잠하다. 이따금씩 까치들이 우짖는 소리만 들리고, 어디 멀리서 이름 모를 새의 간헐적인 신호 같은 소리만 들려올 뿐 사방이 고즈넉하다. 나무의 잎들도 미동조차 없는 데다 새들의 노래 소리까지 사라지니 온통 숲이 생기를 잃은 것 같다. 올 여름 무더위의 신호탄인가.
소설 모비딕에서 묘사되는 무풍 지대는 지리적 의미 이외에도 상징적 의미가 다분하다. 이 지대를 지나는 동안 인물들은 지루함과 무력감, 권태와 절망감 같은 것들을 쏟아낸다. 삶도 그럴 때가 있다. 어느 순간 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돈다는 느낌.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자 흐름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참 다양한 바람을 보고 듣고 느껴본 것 같다. (잊지 못할 최고의 미풍은 쿠바 해안 모래사장에서 느꼈던 바람이다.) 제주 한라산 입구에서 들었던 숲의 바람 소리가 떠오른다. 꼭 해변에서 밀려드는 파도 소리 같았다. 물의 이동과 공기의 이동 소리가 이토록 닮았구나. 눈을 가린 채 소리만 듣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도무지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쏴-쏴- 귓가에 바람이 밀려드는 것 같다.
이른 아침 조용히 산책길을 걸으며 원초적 상상을 해 볼 때가 있다. 세상이 마뜩지 않을 때 대안적 삶을 꿈꿔 보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다. 몽상이면 어떤가. 지구에서 삶을 처음 (혹은 다시) 시작한다면 어떻게 살면 좋을까. 어떤 어떤 일로 파국에 이르러 문명이 붕괴되었을 때 어떻게 재건하면 좋을까. 무엇부터 합의하면 좋을까. 제1원리로는 무엇이 좋을까. 헌법에 해당하는 헌장을 만든다면 어떤 수칙을 넣으면 좋을까.
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을 펼치면서 무지의 베일을 가정했다. 나의 태생 조건이 뭐가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두가 보편적으로 동의할 삶의 기본 질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루소나 홉스, 로크 같은 사회계약론자들도 바람직한 사회 질서를 제안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곧잘 인류의 원초적 상황을 상상했다.
제1계명으로 ‘서로 돌보라’는 어떨까.
나와 비슷한 어떤 것보다 나와는 다른 타자에게서 배울 게 더 많다. 같은 한국(인)보다는 이웃나라 일본(인)에게서, 같은 아시아인 일본(인)보다는 서양이나 다른 지역(이른바 제3세계) 나라와 사람들.
인간 아닌 다른 동물 종 (가령, 같은 포유류인데도 바다로 다시 들어간 고래라든가, 포유류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삶의 길을 개척한 조류)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하지만, 요즘은 같은 동물이 아닌 생물 종, 식물에게서 배울 게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동물(네 발 짐승)은 사방으로 분주히 돌아다닌다. 나무는 주로 위를 향해 뻗어간다. 동물이라면 전위, 나무라면 우듬지 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다. 다만 더 큰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땅에 발을 붙이고 걷되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고 가끔씩 높이 떠 있는 하늘의 별을 쳐다볼 것.
언어는 소통을 위한 몸짓, 손짓발짓, 소리내기에서 진화했겠지만, 사용하면서 점점 세상을 파악하기 위한 거리(틈새)를 확보해 주는 쐐기 역할을 한다. (언어적) 사고는 반응을 지연시킴으로서 더 많은 변수를 감안해서 행동하게 한다.
생각에도 모세혈관(실핏줄)이 있다.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뻗어가면 더 좋을 테고, 가는 혈관까지도 자주 흘러야 막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인사동에서 차를 마시면서 다도를 생각했다고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형식이다. 어느새 형식이라는 말은 형식주의라는 말과 더불어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형식이야말로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왜 형식은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질서인 도로 나아가고, 또 어떻게 하면 형식주의나 관료주의로 고착되는 될까.
질서와 조직화를 필요로 하되 유연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룩한 것에 연연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태초에 세상에는 '무엇'이 있고(혹은 생겨났고) 어느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이고 지금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가(on the move).
오늘도 대우주와 소우주의 오묘함과 경이로움에 잠시 취해 보았다.
말 그대로 바람이 없는 지대다. 바람이 불지 않거나 극히 미미한 곳.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다. 공기는 압력 차이, 즉 기압의 차이에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풍 지대는 그런 공기의 이동이 (거의) 멈춘 곳이다.
적도 해양에 그런 지대가 있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그런 무풍 지대 이야기가 등장한다. 옛날 돛으로 항해를 하던 범선 시대에는 이 해역에 배가 진입하면 빠져나오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바람이 유일한 동력원이었으니까. 덥고 습한 바다 위를 표류하며 맴돌다 자칫 고깃밥이 될 수도 있었다.
오늘 아침 동네 숲이 그랬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이른 아침의 상쾌함은 온 데 간 데 없다. 신기하게도 이맘때면 숲을 가득 채우던 새 소리조차 잠잠하다. 이따금씩 까치들이 우짖는 소리만 들리고, 어디 멀리서 이름 모를 새의 간헐적인 신호 같은 소리만 들려올 뿐 사방이 고즈넉하다. 나무의 잎들도 미동조차 없는 데다 새들의 노래 소리까지 사라지니 온통 숲이 생기를 잃은 것 같다. 올 여름 무더위의 신호탄인가.
소설 모비딕에서 묘사되는 무풍 지대는 지리적 의미 이외에도 상징적 의미가 다분하다. 이 지대를 지나는 동안 인물들은 지루함과 무력감, 권태와 절망감 같은 것들을 쏟아낸다. 삶도 그럴 때가 있다. 어느 순간 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돈다는 느낌.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자 흐름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참 다양한 바람을 보고 듣고 느껴본 것 같다. (잊지 못할 최고의 미풍은 쿠바 해안 모래사장에서 느꼈던 바람이다.) 제주 한라산 입구에서 들었던 숲의 바람 소리가 떠오른다. 꼭 해변에서 밀려드는 파도 소리 같았다. 물의 이동과 공기의 이동 소리가 이토록 닮았구나. 눈을 가린 채 소리만 듣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도무지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쏴-쏴- 귓가에 바람이 밀려드는 것 같다.
이른 아침 조용히 산책길을 걸으며 원초적 상상을 해 볼 때가 있다. 세상이 마뜩지 않을 때 대안적 삶을 꿈꿔 보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다. 몽상이면 어떤가. 지구에서 삶을 처음 (혹은 다시) 시작한다면 어떻게 살면 좋을까. 어떤 어떤 일로 파국에 이르러 문명이 붕괴되었을 때 어떻게 재건하면 좋을까. 무엇부터 합의하면 좋을까. 제1원리로는 무엇이 좋을까. 헌법에 해당하는 헌장을 만든다면 어떤 수칙을 넣으면 좋을까.
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을 펼치면서 무지의 베일을 가정했다. 나의 태생 조건이 뭐가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두가 보편적으로 동의할 삶의 기본 질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루소나 홉스, 로크 같은 사회계약론자들도 바람직한 사회 질서를 제안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곧잘 인류의 원초적 상황을 상상했다.
제1계명으로 ‘서로 돌보라’는 어떨까.
나와 비슷한 어떤 것보다 나와는 다른 타자에게서 배울 게 더 많다. 같은 한국(인)보다는 이웃나라 일본(인)에게서, 같은 아시아인 일본(인)보다는 서양이나 다른 지역(이른바 제3세계) 나라와 사람들.
인간 아닌 다른 동물 종 (가령, 같은 포유류인데도 바다로 다시 들어간 고래라든가, 포유류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삶의 길을 개척한 조류)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하지만, 요즘은 같은 동물이 아닌 생물 종, 식물에게서 배울 게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동물(네 발 짐승)은 사방으로 분주히 돌아다닌다. 나무는 주로 위를 향해 뻗어간다. 동물이라면 전위, 나무라면 우듬지 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다. 다만 더 큰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땅에 발을 붙이고 걷되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고 가끔씩 높이 떠 있는 하늘의 별을 쳐다볼 것.
언어는 소통을 위한 몸짓, 손짓발짓, 소리내기에서 진화했겠지만, 사용하면서 점점 세상을 파악하기 위한 거리(틈새)를 확보해 주는 쐐기 역할을 한다. (언어적) 사고는 반응을 지연시킴으로서 더 많은 변수를 감안해서 행동하게 한다.
생각에도 모세혈관(실핏줄)이 있다.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뻗어가면 더 좋을 테고, 가는 혈관까지도 자주 흘러야 막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인사동에서 차를 마시면서 다도를 생각했다고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형식이다. 어느새 형식이라는 말은 형식주의라는 말과 더불어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형식이야말로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왜 형식은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질서인 도로 나아가고, 또 어떻게 하면 형식주의나 관료주의로 고착되는 될까.
질서와 조직화를 필요로 하되 유연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룩한 것에 연연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태초에 세상에는 '무엇'이 있고(혹은 생겨났고) 어느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이고 지금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가(on the move).
오늘도 대우주와 소우주의 오묘함과 경이로움에 잠시 취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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