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과 테니스

더듬이
2025-05-24 10:35
구한말 조선에도 외국인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선교사, 외교관, 무관, 통역관과 그 가족 등 다양했다. 이들은 이른바 스포츠 레저를 즐겼다. 그중에 테니스도 있었다. 어느 여름. 땀을 흘리며 테니스를 치고 있는 주한 외국인들을 조선 양반이 지나가다 보고 혀를 찼다. “힘든 일은 아랫것들 시키면 되지 왜 사서 고생을 하누.” 알려진 이야기다.

하루가 멀다고 더 쉽고 빠르고 편리한 기술과 기계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 스포츠만큼은 예외다. 나날이 운동 장비도 좋아지고 코칭이나 전략도 인체공학의 도움을 받지만, 경기를 기계가 대신하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기계가 개발되었다고 치자.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는 일에 시달리던 노동자에겐 힘을 덜게 되었으니 반가울 수 있다. (그 일자리를 아예 기계에게 빼앗기는 상황은 잠시 접어 두자) 자신의 건강과 체력을 위해 무거운 역기를 들어 올리던 사람에겐 그 기계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쓸 만한 통번역기가 나와 있는 시대의 젊은이는 축복 받은 것 같다. 사실은 그 반대다. 직접 힘들여 오랜 시간 외국어 공부를 해야 할 동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전엔 외국어 읽고 대화하려면 별수 없이 힘들여 공부해야 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자산이 되어 두고두고 득이 되는지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외국어 사용의 혜택은 다차원적이다. 그저 모국어에 더해 다른 언어를 하나 추가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언어를 교차 사용하는 과정에서 뇌의 수행 통제 능력을 키운다. 게다가 다른 언어를 알면 그 나라는 물론 자기 나라 문화의 이해 폭도 커진다. 다중 언어자는 애매함에 대한 관용 지수도 높은 경향을 보인다. 낯설고 복잡한 상황을 긍정적 포용적 태도로 해석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지 발달뿐 아니라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준다.

괜한 고생을 ‘사서 고생’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도 있다. 진리다. 대개는 그 의미를 나이 들어 늦게서야 깨닫는다. 일찍 깨달을수록 좋다. 마지못해 했던 ‘개고생’이 돈 주고도 못 살 ’값진 고생’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인생에선 왕왕 있다.

이 일방적인 기술 과잉 시대의 해악은 (예외적인 특권적 소수를 제외하고는) 인간 개인의 잠재력을 피기도 전에 누르고 꺾고 길들이고 때를 놓쳐 시들게 한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인간이 자기계발에 힘쓰는 게 아니라 기계(시스템)의 개발/개선에 인간 개발자가 경쟁적으로 봉사하고 나머지 인간이 (데이터-카우로) 사용되고 있는 형국은 아닌가.

듀얼 브레인? 늘 그렇듯, 이름은 참 그럴듯하다.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보거나 참고 자료를 찾거나 요약 정리하거나 초안을 잡거나 하는 걸 AI의 도움을 받으니 얼마나 좋은가? 마치 내 두뇌에다 인공 두뇌의 도움을 더하니 마치 고성능 지능을 두 개 장착해서 쓰기라도 하는 것 같은 투다. 사실은 자기 (두뇌)가 할 일을 어떤 정도로든 기계에 넘겨주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양질의 사고력을 활용할 기회는 줄기 때문에 그 능력이 차차 뒷걸음질친다는 사실을 모를까. 이런 식의 눈속임에 이끌려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기 능력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배양하고 단련하는 대신 자진해서 약화시키고 퇴화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모를까.

원래 책을 읽고 자료를 찾고 하는 활동이 모두 인류의 (듀얼 정도가 아니라 하이퍼-멀티 브레인 격인) 집단 두뇌를 활용하는 것이다. 다만 그 모든 도움과 지원들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머리속에서 통합해서 홀로 지적 작업(깊은 생각)을 수행할 때 최종의 가치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 이 고도의 사고 활동을 마치 둘로 쪼개어 분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라는 걸 한 번도 제대로 안 해 본 사람의 발상이다. 창의적인 사람은 단번에 안다. 자료를 찾고 읽고 참고하고 온갖 외부의 것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여기엔 성능 좋은 AI도 포함될 수 있다) 결국에는 내 머리로 통합하고 소화하고 숙고한 후에 재탄생된다는 사실을.

남들이 눈치 챌 정도로 속임수가 얕으면 야바위꾼 소리를 듣는다. 남들을 속여 피해를 줬다가 덜미가 잡히면 사기꾼으로 처벌받는다. 다수가 못 알아 보게 크게 속이면 추종과 선망의 대상이 된다.

어떤 기술이든 충분히 발전하면 마술과 구분할 수 없다. 아서 C. 클라크는 자신이 한 말의 뜻을 알고는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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