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회복

더듬이
2025-05-28 07:50
신호등의 파란불이 켜졌다.
출발하기 전 먼저 좌우를 살펴보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아니다 다를까 짙은 회색 SUV 차량 한 대가 내 앞을 휙- 하고 지나간다. 안심하고 걸음을 내디뎠다면 내 몸은 어디론가 튕겨나갔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눈앞의 차량 앞문 유리창 너머로 조수석을 지나 운전석의 남성이 왼손은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폰을 들고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이 잡힌다. 보행 구간을 지나면서도 최소한의 주의를 주변에 기울이지도 않고 가속기를 밟은 것이다. 어쩌면 신호가 바뀐 것을 알고 더 빨리 지나치려고 더 세게 밟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운전대를 잡은 채로 그 시간에 뭘 들여다 보고 있었을까. 급한 문자라도 왔던 걸까.
요즘은 이런 사람을 곳곳에서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래서 보행 구간에서도 주변의 차량을 살피고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한다. 무엇이든 다같이 하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서로 서로 무언의 면죄부를 내주고서 부담 없이 둔감해진다. 다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으니 상대가 그러다 어떤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도 피차 용서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번 북캠프의 주제는 감각의 회복이다.
지금 도심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감각은 내 주의를 뺏으려는 온갖 것들로 교란된 상태다. 오늘날 인공 문명이 우리 주위를 에워싸기 전 자연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 주의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에 선택적으로 적절히 반응했다. 주의라는 기제 자체가 그런 필요에 의해 진화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주의가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불순한 의도를 가진 주체들(이 구축해 나가는 시스템)에 의해 무차별 공략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 결과 우리는 불요불급한 것들에 과다하게 주의를 빼앗기고 시달린다. 그러다 보니 주의의 질은 낮아졌다. 둔해졌다는 말이다. 그 결과 우리의 감각도 생각도 차례로 덩달아 무뎌질 수밖에 없다. 

북극, 남극, 바이칼호, 킬리만자로, 판타날 같은 곳을 찾아가는 이유 중에는 남들이 잘 모를 한 가지가 있다. 그런 곳에 가서 나는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지극히 인공적인 구조물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런 곳에서 인류의 기원을 상상할 때가 많다. 한겨울 얼어붙은 바이칼호 위를 걸으면서 빙하기 극한 상황에서 살아야 했던 사피엔스의 선조를 상상한다. 그 상상의 끝은 지금 내 삶에 대한 반추며 성찰reflection이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의 경이로움과 여기 내가 공존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다) 지금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되었나. 이게 최선일까. 다시 살아 본다면 어디서 무엇에서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매일 아침 다시 한 번 그 시원origin을 상상하고 지금 이곳에서 내가 살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생각해 본다.

생각의 출발점이 감각이다. 살아 있는 내 몸의 오감과 생생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접하면서 일어나는 가장 직접적인 반응이 내 감각이다. 감각에 주의를 기울일 때 서서히 생각으로 옮겨간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감각이 더해지면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의 지층이 조금씩 올라간다.

북캠프 장소인 행복공장 수련원은 감각을 회복하기 좋은 곳이다. 그곳에서는 나의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 좋다. 말을 많이 하기보다 조용히 들려 오는 것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좋다. 그것들에 내 오감이 반응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집중해 보는 것이다. 그럴 때 내 안의 자연스러운 것들이 새살이 돋듯 조금씩 되살아나고 생기도 돋기 시작한다. 정화라고 불러도 좋고 요즘 유행어로 디톡스라 해도 좋다. 맑은 샘물에 세수를 하고 난 듯한 말간 맨얼굴의 내 모습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
재회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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