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있다.
무모한 도전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완고한 현실 앞에서 남들은 영리하게 뒤돌아 설 때 무슨 생각에선지 저 혼자서도 그 벽을 향해 돌진해서 부딪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계란이 내 가슴을 치기라도 한 듯 마음이 아플 때가 많았다.
그 기백은 높이 사도 연민을 넘어 칭찬과 동조에까지 이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다 언젠가 달리 상상해 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가 앞에 있다고 치자.
그 바위에 계란이 날아가 부딪혀 '퍽'하고 깨지고, 노른자위가 처연하게 흘러내린다고 하자.
그 장면이 반복된다면 왜 그런가,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지 않을까.
그러다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팔을 걷어 부치고 바위를 밀어보기 시작하지 않을까.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사연을 듣고는 가세하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가서 사람들을 불러 오지는 않을까.
그렇게 모여든 사람이 결국에는 그 바위를 함께 뜻하는 방향으로 굴려 보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제 어떤 글을 읽다가 캐나다 음유시인 가수 레너드 코언의 노래 가사 중 '깨진 틈새로 빛이 들어온다'라는 부분을 해석한 대목을 봤다. 정확히는 '모든 것에는 깨진 금crack이 있다. 거기로 빛이 들어온다'이다. 모자람과 불완전함이 오히려 아름다움을 낳는다는 뜻쯤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상황을 조금 바꿔 사방이 벽에 막혀 절망적인 어둠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을 한번에 부수지는 못하더라도 약간의 균열이라도 낼 수 있다면 그 가는 틈새로도 빛이 새 들어오지 않겠는가.
어둠을 깨는 빛은 핀셋의 끝 같은 틈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그런 틈들이 늘어나면 세상은 그 빛들로 조금은 더 밝아지지 않겠는가.
내가 상상하는 빛의 가능성이자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문득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바위를 향해 날아가는 계란의 꿈도
더없이 가냘플 망정 한없이 아름다운 어떤 빛일 것이다.
무모한 도전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완고한 현실 앞에서 남들은 영리하게 뒤돌아 설 때 무슨 생각에선지 저 혼자서도 그 벽을 향해 돌진해서 부딪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계란이 내 가슴을 치기라도 한 듯 마음이 아플 때가 많았다.
그 기백은 높이 사도 연민을 넘어 칭찬과 동조에까지 이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다 언젠가 달리 상상해 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가 앞에 있다고 치자.
그 바위에 계란이 날아가 부딪혀 '퍽'하고 깨지고, 노른자위가 처연하게 흘러내린다고 하자.
그 장면이 반복된다면 왜 그런가,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지 않을까.
그러다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팔을 걷어 부치고 바위를 밀어보기 시작하지 않을까.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사연을 듣고는 가세하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가서 사람들을 불러 오지는 않을까.
그렇게 모여든 사람이 결국에는 그 바위를 함께 뜻하는 방향으로 굴려 보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제 어떤 글을 읽다가 캐나다 음유시인 가수 레너드 코언의 노래 가사 중 '깨진 틈새로 빛이 들어온다'라는 부분을 해석한 대목을 봤다. 정확히는 '모든 것에는 깨진 금crack이 있다. 거기로 빛이 들어온다'이다. 모자람과 불완전함이 오히려 아름다움을 낳는다는 뜻쯤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상황을 조금 바꿔 사방이 벽에 막혀 절망적인 어둠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을 한번에 부수지는 못하더라도 약간의 균열이라도 낼 수 있다면 그 가는 틈새로도 빛이 새 들어오지 않겠는가.
어둠을 깨는 빛은 핀셋의 끝 같은 틈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그런 틈들이 늘어나면 세상은 그 빛들로 조금은 더 밝아지지 않겠는가.
내가 상상하는 빛의 가능성이자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문득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바위를 향해 날아가는 계란의 꿈도
더없이 가냘플 망정 한없이 아름다운 어떤 빛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