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대련 후에 알게 된 것들

새로
2025-06-18 23:59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아침 일찍 검도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호구(보호구)가 도착한 날이다. 검도는 호구를 쓰기 전엔 혼자 타격대를 치면서 연습하고, 호구를 쓴 뒤에는 상대와 공격과 방어를 차례로 주고받는 대련을 통해 수련한다. 그동안 다른 사범님들의 치열한 대련을 보며 언젠가 나도 대련을 하겠구나 동경해 왔지만, 실제로 호구를 입고 대련을 할 생각을 하니 무언가 준비가 미흡한 것 같다. 내가 벌써 5급 수련생이라니, 이래도 되는 걸까?

관장님이 호구 착용법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셨다. 기성복처럼 훌렁훌렁 입을 줄 알았는데, 끈을 대각선으로 넘기고, 앞뒤로 몇 차례 묶는 일이 꽤 복잡했다. 분명 다 못 외우고, 다음 날 유튜브로 복습할 게 뻔했다. 호구를 착용하자 두툼한 가죽 갑옷을 입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기대와는 달랐다. 갑과 갑상(가슴과 허리에 착용하는 보호대)은 너무 크고, 호면(금속으로 된 망이 있는 머리 보호대)은 문어 소세지가 떠올랐다. 다른 사범님들처럼 호구가 길이 들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를 놓지 않고 있다.

뻣뻣하고 무거운 호구는 예상보다 더 적응하기 어려웠다. 특히 호면은 아래턱을 고정해 기합을 넣기 어렵고, 주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갑갑했다. 호구를 입고 타격대를 몇 번 치고 나니, 관장님이 대련을 해보자고 권하셨다. 대련을 시작할 때는 인사한 뒤 검을 차고 앞으로 세 걸음, 대련을 끝낼 때는 검을 거두고 뒤로 다섯 걸음. 급하게 대련 예절을 배우고, 예상보다 일찍 대련장에 들어섰다. 어리숙한 내 옆으로 힘찬 기합 소리가 들려와 긴장감을 일으켰다.

내가 기억하기로 관장님은 검도를 배우는 내내 내게 칭찬 일색이었다. 운동신경이 있다거나, 자세가 잘 나온다거나, 힘이 좋다거나. 늘 인자하고 차분하셔서 검도 하는 사람은 마음 수련이 되어있는 건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련이 시작되자 관장님은 큰 목소리로 내게 호통을 치셨다. 인사해야지! 검 들어야지!! 검 내려야지!! 똑바로 쳐야지!!! 단연코 근 10년, 아니 15년 동안 누군가에게 그렇게 크게 혼나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호면을 쓰고 있어서 크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소리가 호면을 뚫고 귀에 정확히 꽂혀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머리로는 ‘앞으로 네 걸음, 좌우 머리치기 4번, 뒤로 다섯 걸음’을 외우고 있는데, 죽도는 머리 위에서 휘적거리고 발걸음은 자꾸만 좌우로 미적거렸다. 한 번은 관장님이 대련을 멈추고 자세가 엉망이라며 다시 짚어 주시기도 했다. 휘적거리는 느낌은 있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보였나 보다. 멋모르고 나뭇가지를 휘두르고 다니는 동네 꼬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첫 대련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에도 상대 사범님은 묵묵히 기다려 주셨다. 내가 공격하는 시간은 상대가 방어를 연습하는 시간이고, 내가 방어를 하는 시간은 상대가 공격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사범님의 배려로 나는 줄곧 공격만 집중해서 연습할 수 있었다. 사범님은 내가 머리를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춰주시거나, 타격 횟수를 함께 세어 주셨다. 중간중간 어깨에 힘을 빼라며 다독여 주시기도 했다. 배려해 주시는 사범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내가 미숙해서 사범님의 연습시간을 뺏는 건 아닌지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 마음이 더 빨리, 더 정확한 횟수로 동작을 수행하는 데만 집중하게 하고 천천히 자세를 잡고, 호흡을 고르는 일을 잊어버리게 했던 것 같다.

긴 대련이 끝났다. 나는 무려 세 명이나 되는 사범님들의 배려를 받으며 대련하는 법을 배웠다. 각 상대와 대련이 끝나면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난 뒤 서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나는 허리를 굽히는 것도 모자라 상대를 해주신 사범님들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연습이 끝나면 수련생들은 관장님의 우측부터 단이 높은 순으로 차례로 무릎을 꿇고 앉은 뒤, 가장 우측에 앉은 사범님의 호령에 맞춰 호구를 벗는다. 그리고는 함께 대련한 모두를 향해 절을 하고, “감사합니다!”를 외친다. 혼자 타격대를 칠 때는 그 ‘감사합니다’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어디를 향해 절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함께 검을 맞대고 땀을 흘린 뒤에야 감사하다는 한마디가 오늘 하루 가르침을 주신 사범님들에게 전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은 나도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기뻤다.

검도장에서의 첫 대련. 낯설고 서툴렀지만 뜻깊은 하루였다. 아마 내일은 검도장에 가지 못할 것 같다. 긴장한 몸과 마음을 하루쯤 고요하게 추슬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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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더듬이 | 18일 전
많은 걸 가르쳐주는 무예이군요. 검도의 기운과 절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냐옹이 | 17일 전
저도 태권도 배울 때 많이 혼났어요ㅠㅠ
늘보리 | 15일 전
겉으로 볼 땐 막대기^^를 들고 힘껏 내리치면 되는 간단한 동작 같은데 이게 만만치 않군요! 호구 하나 썼을 뿐인데 첫걸음을 뗀 아이처럼 모든 게 낯설어지는 것도 신기합니당! 화이팅입니당^--^
지니 | 14일 전
잘 몰랐던 검도의 세계를 화자 곁에서 함께 경험한듯한 현장감 높은 생생한 글 정말 감사해요! 왠지 글을 읽는 내내 제가 대련을 하듯 긴장감이 감돌았어요… 저도 사범님께 혼나는 것만 같아서 몸에 잔뜩 긴장이 되지 모예요;;; 윽.. 아직도 무섭다는..;;; ㅎㅎㅎ
호면과 갑, 갑상이라던지.. 생소한 용어와 검도 예절과 규칙을 알수있어서 더 재밌었어요. 무엇보다 진지한 수련생의 마음자세가 느껴져 몸을 단련하는 ‘수련’의 과정이 마음의 수행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같아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음의 수련이 기대됩니다! 응원할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