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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의 위기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5-12-24 18:05
‘남성성의 위기’에 관한 글을 공유합니다. 뉴욕타임스의 평론 기자가 쓴 에세이인데 발췌 번역한 것입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메시지와도 연결시켜 생각해 볼 것이 많아 보입니다.
영어 원문 링크

왜 남성들은 타인과 자신의 감정이 연결되는 것을 그토록 어려워할까?

남성들과 그들의 미래에 대한 경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교육 부족과 친구 부족, 포르노와 도박, 자살률... 반면 불룩한 몸매를 자랑하는 기술 엘리트들은 마초적 에너지의 주입을 요구하며 '정자 경주'까지 벌인다.

이 위기는 사실 책임감의 위기다. 남성들이 감정적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어른답게 행동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위기에 처한 것은 남성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남성의 감정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남성 동정증himpathy'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과장되었으면서도 빈약한 논의 속에서 한 권의 오랜 책이 재주목받았다. 남성주의 커뮤니티의 대모로 (잘못) 추앙받았던 노라 빈센트의 Self-Made Man(2006).

18개월간 남자로 변장해 남성 전용 공간에 잠입했다. '네드'라는 이름으로 데이트도 하고 취업 지원도 하고 수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볼링 모임에도 가입했고 스트립 클럽도 배회했다.

빈센트는 이 실험이 남성들은 여성들이 상상도 못할 여유로운 삶 살아간다는 사실 드러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만난 남성들은 외롭고 불행했다. 그들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었다. 남성으로 데이트 시도했을 때 여성들의 잔혹함은 그녀를 충격과 굴욕감에 빠뜨렸다.

빈센트의 기록이 남성 권리 포럼에서는 맘대로 재구성된다. 그녀의 자살(실험 16년 후 치료 저항성 우울증으로 오랜 고통 끝에 의료 지원하 자살)을 여성들에게 거절당한 것과 연결시킨다.

그녀의 새로운 팬들은 빈센트를 남성의 고통을 이해한 드문 여성으로 본다. 새 추종자들은 대략 젊은 층인데 책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대부분은 틱톡에 쏟아지는 추모 영상으로 알게 됐다.

빈센트를 아는 이들은 그녀의 책이 남성 권리 운동가들에게 수용되면서 왜곡되는 모습에 불안해한다. 그녀의 글을 다시 읽으며, 뒤엉킨 문장과 동시에 애쓰면서도 무작위적인 듯한 분노를 헤쳐 나가다 보면 그녀가 원했던 건 주목받는 것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 책 자체는 새 팬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논지가 뒤섞여 있으며, 진솔하고 자기 고발적이다. 또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애절하다. 이 책은 지금은 낡고 편협해 보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위기로서 남성성을 내부에서 그려내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남성들이 고통받는 이유는 여성에게 학대받거나 변하는 풍속, 변하는 경제 탓이 아니다. 빈센트가 기록한 진짜 상처는 훨씬 근본적이다: 종종 어린 시절에 배워서 자신에게 가하는 상처다. 감정과 표현력, 언어 자체의 포기. 빈센트가 네드로 치러야 했던 대가이기도 했다. 

그녀의 실험은 장난처럼 시작됐다. 드랙킹 친구가 빈센트에게 남장으로 외출해 보라고 부추겼다. 플란넬 셔츠, 야구 모자, 콧수염과 턱수염을 달고 나섰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성일 땐 같은 거리에서 쳐다보고 훑어보는 시선에 익숙했지만 이번엔 남자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썼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지 않음으로써, 의도적으로 응시하지 않음으로써 보여준 존중이었다.” “시선을 피하는 모습엔 단순한 존중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각자의 작은 영향권과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는 작은 완충지대를 지켜주려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지 수준 아래에 숨겨진 의미의 층위가 흐르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실험을 시작했다. 목표는 남성이 더 쉬운 삶을 산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여성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친밀감과 소통으로 가득 찬 비밀스러운 삶을 산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었다.

처음엔 남성적 암시의 세계가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점차 남성들 사이의 소통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색하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 부딪히며 합류하려는 범퍼카 같았다.”

남성들은 서로의 존재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친밀함에 굶주린 듯했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감정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감정을 명명조차 못했고, 어떤 이들은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 형제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남성들은 어릴 때부터 눈물과 감정 표현을 강제로 억눌러왔다.” “성인이 될 때쯤이면 자신이 느끼는 걸 진정으로 표현할 어휘력이나 감정적 인식조차 잃어버린다.”

어릴 적 그녀는 소년들의 무절제한 모습을 부러워했지만, 네드로서 좁은 감정 범위로 살아가는 것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모든 것을 억눌렀다: 웃음, 말투, 제스처, 표정까지. 즉흥성은 사라지고 간결함, 위선, 통제만 남았다.”

여성들이 누리는 감정적 폭이 그리웠다. “여성들은 옥타브를 가졌다. 눈물과 기쁨, 불안과 절망, 그리고 관능적 화려함의 크로마틱 스케일을”

남성들은 아이러니와 침묵, 분노를 가졌다. 그 감시와 자기 감시는 지치게 했다. “누군가는 항상 당신의 남성성을 평가한다. 다른 남성들이든, 다른 여성들이든, 심지어 아이들이든.”

나중에 그녀가 정체를 드러냈다. 다들 놀랐다. 충격이 가라앉자 모든 관계는 거의 순식간에 더 가까워지고 편안해졌다. 볼링 파트너는 마음을 열고 아내의 암 투병 이야기를 털어놨다. 냉담하고 위압적이던 수도승들도 속마음을 털어놨다. 모두가 동의했다: 네드를 좋아했지만, 노라가 필요했다.

남성성이 강요하는 단절 상태 속에서 빈센트는 여성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그들의 마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도록 강제된다.

남성성이 내면의 삶을 침략하는-상상력을 비워내고 사적인 언어를 약탈하는 이 이야기는 지금 당장 피할 수 없는 현실처럼 느껴진다.

올해 남성성, 그 신화와 침묵을 다루지 않은 영화가 있었던가? 〈트레인 드림스〉〈햄넷〉〈원 배틀 애프터 어너더〉 심지어 〈프랑켄슈타인〉까지.

이 작품들 상당수는 상징성을 강하게 추구하며 일종의 틀을 따른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이를 애도하거나 찾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아이는 서사적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등장하자마자 죽임을 당하고 너무나 대충 그려져 진정한 슬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엄밀히 말해 그 아이는 성인의 잃어버린 순수함과 진정한 자아를 대신하는 존재다. 우리는 남성들이 자신의 삶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로널드 레반트는 ‘남성의 규범적 알렉시티미아’ 개념을 대중화했다. 알렉시티미아란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어원적으로는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부족함을 의미)다. 소년들은 여성적으로 보일까 두려워 감정을 억누르도록 배움으로써 감정을 식별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연구에 따르면, 유아기 소년들은 소녀들보다 외적으로 더 감정적이지만 2세가 되면 언어적 표현력이 떨어지고, 4세가 되면 얼굴 표정 표현도 줄어든다. 사춘기에 이르러 소년들이 공개적으로 표현해도 된다고 여겨진 유일한 감정은 분노였다.

『플레시』의 주인공 이스트반을 묘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부커상 수상을 두고 가디언은 “소설의 남성적 재확립”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스트반에게 내면의 세계란 없다. 그는 언어가 거의 없다. 'OK'라는 말을 약 500번 반복한다. 자신이 언제, 왜 분노에 폭발하는지, 혹은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소설 속 그의 성관계 대부분은 원치 않거나 혼란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욕망이나 신체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다. 소설 대부분에서 그는 심하게 땀을 흘린다는 사실만 인지하는 듯하다. 마치 남성적 수행의 보이지 않는 대가(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아들에게도 기대할)를 우리에게 알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스트반의 관찰은 함축적 의미로 가득하다. 그는 우리에 갇힌 동물들과 탁한 물을 발견한다. 멀리 있는 언덕들을 불길한 눈빛으로 응시한다: “그것들은 마치 시트를 덮어씌운 가구처럼 보여서, 정확히 무엇이 그 아래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빈센트는 자신과 타인으로부터의 단절 상태를 엿보는 것을 묘사한다. 많은 남성들에겐 일상적인 상태임에도 그들이 폭력으로 폭발하지 않는 한 거의 관심이나 동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수년 전 나는 뛰어난 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는 부자 관계를 다룬 자전적 소설을 쓰고 있었다. 초고엔 여백에 메모가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T와 F 추가 예정” “여기에 T와 F 추가” “T와 F 필요”...

알고 보니 “T와 F”란 “생각과 감정thoughts and feelings이었다.

이 진단은 얼마나 맞을까? 남성들이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 경향을 고려하면 남성의 과묵함을 집요하게 지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진 않을까? 아니면 언어의 부재라는 개념 자체가 유독  고뇌하는 작가들에게 중요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런 인색한 질문 자체가 지금의 위축된 논의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Self-Made Man이 출간된 시기는 남성성에 대한 논의가 개방적이고 진정으로 해방감을 주던 시기였다. 다양한 관점의 관련 저술들이 쏟아졌다. 이 저자들을 한데 묶은 건 동지였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성이 마침내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을 함께 읽으며 공유했기 때문이다. “여성성이 거의 한 세기 동안 문제시되어 온 방식 그대로, 남성성도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땐 더 풍부하고 실질적인 논의가 가능할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물론 위험이 없는 논의는 아니었다. “우리는 남성의 운명을 걱정했기에 신뢰받지 못한 페미니스트들이었다”라고 한 여성 작가는 썼다.

남성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손에 고통받는 여성과 아이들의 고통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근원을 뿌리 뽑기 위한 것이다.

결국 빈센트는 남성들 안에서 목격한 고통, 그 깊은 침묵과 단절감이 낯설어서, 아니면 익숙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그녀의 자살을 떠올린다. 그녀는 한 에세이에서 자살 시도 경험을 묘사했다: 자신의 목에 식칼을 들이댄 것이다. 그녀의 책은 최선의 경우, 모든 고통이 읽힐 수 있도록, 또한 더 많은 언어가 해방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분명하고 직접적인 초대장이다.

이 글의 초고는 여기서 끝났다. 컴퓨터를 닫으며 기분이 좀 어수선했다.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쓸면서 창 밖에 걸린 풍경 소리를 들었고, 쓸면서 나는 쓸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았고, 풍경 소리를 듣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내가 무언가를 깨닫기를 기다리는 듯했고, 깨달았을 때 나는 바닥에 앉았다.

그 풍경은 리처드가 죽은 뒤 받은 선물이었다. 그는 지난 10년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우리 가족의 세 남자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아주 다른 사람들이었다. 도시와 시골, 고독과 가족에 둘러싸인 삶, 중산층과 파산.

그들 모두, 아마도 위기에 처한 남성성에 관한 에세이에 자신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들에 대해 쓰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자기 마음으로부터 도피하는 건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들의 죽음은 고독했고, 깨기 어려운 수치스러운 침묵이 퍼져 나갔다.

지금은 거의 아무도 그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앉아 그들이 느낀 것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어떤 말이 있었을까, 어떤 말이 필요했을까? 나는 그들의 침묵 속에 오랫동안 앉아 바닥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바람이 계속해서 풍경 사이를 스쳐 지나갔고, 풍경은 흔들리며 떨며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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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단지 프로필 단지 | 10일 전
나눠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돌아보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읽으면서 많이 놀랐고, 마음이 아팠네요.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 10일 전
"그들에게 어떤 말이 있었을까, 어떤 말이 필요했을까?... 풍경은 흔들리며 떨며 노래했다."
이쯤에서 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흐느끼게 되더군요. 머릿속에선 숱한 사람과 장면들이 스쳐지나가면서요.
말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던, 혹은 제대로 들어줄 줄 몰랐던 사람들...
사람이 침묵하고 정적이 흐를 때, 풍경이 떨면서 노래했다는 마지막 문장이 얼마나 큰 깨우침을 주던지요.
느낌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