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대입해본 '활동적 삶'의 개념들
늘보리
2024-09-26 11:31
전체공개
1, 2장과 5장의 절반까지만 읽은 채로 독후감을 작성한다.(ㅠㅠ) 책을 읽기 전, 틈싹에 방문한 00님(셋째주 모임 참석)이 독후감 제출 당일 저녁까지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일주일 뒤 내 모습을 예감했다.ㅎㅎ 00님으로부터 아렌트가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 작업, 행위로 나눈다는 설명을 듣고는, 왠지 아렌트가 ‘노동'을 설명하기 위해 ‘작업'과 ‘행위' 개념을 추가하여 설명하지 않았을까 예상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빗나간 예측이 현대인의 삶이, 혹은 나 개인의 삶이 ‘노동'에 많이 치우쳐져 있다는 방증이겠구나 싶었다. 물론 내가 생각해온 ‘노동'은 아렌트의 개념으로 보면 ‘노동+작업'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 내 삶을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 그리고 활동적 삶 안에서도 노동, 작업, 행위로 나눠본다면 각각은 어떤 비율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렌트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을 똑같이 중요시하면서도, 우리 삶이 활동적 삶, 그 중에서도 노동과 작업에 치우쳐졌다고 말한다.(말하는 것 같다……..;;;) 1인 가구인 덕분에 관조적 삶을 근근히 챙겨갈 수 있지만, 과도한 일(노동과 작업의 총체)이 비집고 들어오면 쉽게 자리를 내주곤 한다. 고독할 수 있는 시간, 나 자신과 오롯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낀다. 동시에 활동적 삶은 건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아렌트의 우려대로 공론 영역 안에서 활발히 이루어져야 할 ‘행위’의 비중은 작고 깊이는 얕다. 이 부분은 2번에 좀더 기록해보기로 하고… 재미있는 점은, 개인적으로 최근에 시작한 ‘일’을 구성하는 노동, 작업, 행위의 비중이다. 손님들과 소통하면서 직접 만든 요리를 제공하는 경험을 세 개의 층위로 나눠보면 분명하게 나뉘지 않는다. 요리를 하는 일이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니 노동이면서도, 아이디어를 녹여낸 새로운 메뉴라는 점에서 작업이면서, 손님들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만들어지니 행위이기도 하다. 같은 행동이지만 그날의 컨디션이나 마음상태에 따라 비중이 달라지기도 한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요리하는 과정에 창조성을 녹여내는 순간도 줄고, 손님들과의 소통에도 소극적이어진다. 대개는 고독한 시간을 통해 내면을 단단히 다졌을 때, 활동적 삶도 더욱 건강해지는 것 같다.
2. 공론 영역에서의 ‘행위’는 얼마나 건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렌트는 사적영역만 있는 삶이 노예와 같은 삶, 자유가 없는 삶이라고 비판한다. 사적영역을 충실히 챙기면 매우 자유로울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인간은 공론 영역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이해를 깊이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공론 영역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상처받기 마련이고, 그런 상처들이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데 부정적 영향을 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렌트가 제시한 ‘관계의 그물망' 개념에 주목한다. 나의 모든 행위는 이전에 일어난, 그리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무수한 행위들의 그물망 안에 있으며 하나의 행위가 어떤 행위로 나아갈 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는 것은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일임과 동시에 뜻밖의 자유를 선사한다. 특히 다음 글귀는 복잡한 관계망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반목을 조금 더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준다.
“인간은 매일 죄를 범할 수 있으며, 관계의 그물망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한, 항상 죄를 짓기 마련이다. 따라서 죄는 항상 용서하여 잊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알지 못하고 행한 것으로부터 부단히 인간을 해방시켜야만 인간의 삶은 계속 가능할 수 있다. 인간은 행한 것으로부터 서로를 해방시켜줌으로써만 자유로운 주체로 남을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시작하겠다는 부단한 의지를 통해서만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위대한 힘을 부여받을 수 있다.”(책 p. 347)
3.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일! 5장 행위편의 마지막 대목이 진심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인간사의 영역인 세계를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황폐화로부터 구원하는 기적은 결국 다름 아닌 탄생성이다. 존재론적으로 이 탄생성에 인간의 행위능력이 뿌리박고 있다. 달리 말해 기적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 새로운 시작, 즉 인간이 탄생함으로써 할 수 있는 행위다. 이 능력을 완전히 경험하는 것만이 인간사에 희망과 믿음을 부여할 수 있다. ……..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말은, 복음서가 ‘기쁜 소식'을 천명한 몇 마디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p. 354-355)
이 말이 더욱 와닿은 이유는… 내년 봄이면 조카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독후감을 마무리했으니 남은 부분도 열심히 읽고 참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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