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프로젝터와 하얀 벽

2407 시즌 - 책 <마틴 에덴 1, 2>
경비병
2024-10-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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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이 루스에게 느꼈던 강렬한 ‘사랑’은, 루스가 발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었다. 책에서 말하듯 “그는 타고나기를 사랑이 많았”다. 마틴은 사랑을 쏘는 빔프로젝터였으며 그것을 비춰 자신의 눈을 즐겁게 할 벽이 필요했다. 그러다 상위 계급의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고, 처음 보는 환경의 놀라움과 동경의 감상들이 모여 루스라는 여인에게서 폭팔하게 된다. 내 생각에는 그 자리에 루스가 아닌 적절한 예절을 갖춘 다른 부르주아 여성이었어도 마틴은 똑같이 끌렸을 것이다. 그 끌어당기는 힘의 원천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루스는 마틴의 하얀 벽이 되었다.

마틴은 드디어 자신의 사랑을 열렬히 비출 대상을 찾았고 사랑을 제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다. 그간 자신의 것임에도 자신이 누릴 수 없었던 그 ‘사랑’을 말이다. 이후 자신이 루스에게 느끼는 매력을 다른 남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에 의아해하는데, 루스가 스스로 사랑을 발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얀 벽 하나에 의존하는 것은 점점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연애시 연작>을 쓰려면 찬미의 대상인 어떤 여자가 있었을 테고, 그게 그 시에서 아쉬운 점이야” - 2권 97p

이 말을 한 브리슨덴은 마틴의 문제를 알았던 것 같다. 마틴의 유일한 대상, 그것도 ‘창백하고 시들시들’한 루스라는 것에 놀랐고. 이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뼛속 깊이 썩어 문드러져 죽어 버릴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 사실 브리슨덴도 작중 후반에 마틴의 두 번째 벽이 되어준 인물이지만, 아쉽게도 마틴이 루스의 입으로 이별 확인을 받은 그날 브리슨덴은 자살했다. 두 개의 벽이 한 번에 무너진 것이다.

마틴은 자신의 내면에 사랑이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자립할 벽을 만들었어야 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 ‘사랑은 대상이 아닌 태도’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만약 그랬다면.. 유일한 하얀 벽이 사라지고 사랑이 끝없는 허공을 통과해 상이 맺히지 않을 때, 마틴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사랑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다른 벽들도 마련이 됐으리라. 그러나 독서와 글쓰기에만 몰두했고 그렇게 균형을 잃었다.

결말에 이르러 마틴의 빔프로젝터가 빛을 잃었을 때 루스라는 벽이 다시 다가왔다. 아.. 아.. 덕분에 더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사랑’이 반사되지 않는 벽의 민낯을!

“이제 그는 알았다, 자기가 정말로 그녀가 사랑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가 사랑한 사람은 이상화된 루스, 자기 자신이 창조한 천상의 존재, 자기가 쓴 연애시의 환하게 빛나는 정신이었다. 부르주아인 실제의 루스, 부르주아들의 모든 결정과 가망 없이 왜곡된 부르주아 심리를 가진 그녀를, 그는 사랑한 적이 없었다.” - 2권 2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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