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결성은 인류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시밤
2024-04-1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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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공지능이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A) 인간의 몸과 구분되는 별도의 하드웨어를 갖춘 소프트웨어. 가령 컴퓨터나 로봇청소기처럼 인간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는 인공지능이 담긴 물체. (B) 인간의 몸과 하드웨어적 결합을 이룬 스프트웨어. 신체에 이식된 칩 또는 신체 일부를 물리적으로 대체한 형태가 생각나지만 넓게는 VR기기나 스마트워치처럼 웨어러블도 포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다 익숙한 (A)의 관념을 갖고 있을 듯하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는데 뭐든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마 그래서 지금까지 인공지능에 어떤 흥미나 문제의식도 못 느꼈던 것 같다. 챗GPT는 켜본 적도 없는데, 대체 인터넷이나 기존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랑 다른 게 없는 것 같은데 왜들 이렇게 난리지 싶었다.
그런데 저자도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서 너무도 ‘본 눈’을 장착하고 있어서 새로이 보려는 노력을 멈추면 결국에는 그 대상의 본질이 뭔지 잊게 된다. 이런 망각은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과 외부 환경의 관계 설정을 그르쳐 우리를 디스토피아를 내몰 수도 있다. 이 디스토피아의 현실적인 모습은 영화 <아이, 로봇>처럼 로봇들의 폭동이나 반란보다는, 인간 대다수가 인류가 스스로 야기한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A) 또는 (B) 같은 낮은 차원의 인공지능 문해력에 머무름으로써 인공지능이 내놓은 결과물에 압도당하는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도구라는 관념은 우리의 '본 눈'이 강하게 작동하는 대표적인 예다. 내가 도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린 거라곤 망치, 바퀴, 전구(전기도 아니고 전구...) 같은 '물건'이 전부였다. 문자나 특정 지식 또는 사고방식과 같은 무형의 것들이 발명품이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문체로 글의 역사를 다룬 <갈대 속의 영원>이라는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4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이런 방식으로 글을 읽는 걸 보고 호기심을 느꼈으며 이 사실을 『고백록』에 기록했다. 누군가 자기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처음 봤다고 한다. 그는 주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 이레네 바예호, <갈대 속의 영원> 73p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이런 방식, 그런 행동이란 뭐였을까? 그건 소리 내지 않고 머릿속으로 글을 읽는 행위, 바로 묵독이었다. 인간은 문자를 발명한 이후에도 몇 세기 동안이나 소리를 내지 않고는 글을 읽지 못했다(음독). 그러니까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이보그 1들이 숨 쉬듯 행하는 묵독은 아주 특정한 방식의 읽기에 해당한다. 음독과 묵독은 각기 다른 발명품이다.
여기에 인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 있다. 음독에서 묵독으로의 전환이 더 빨리 일어나지 못한 것은 사회정치적 이유로 문해력의 보급이 천천히 이루어진 것도 있었겠지만, 인류의 문화적 진화 차원에서 의식의 내면화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문자가 의식의 내면화를 얼마나 촉진했는지 측정할 순 없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인간의 지능이나 정신적 성숙(의식)도 사실은 문자, 책, 망치, 바퀴, 전구를 비롯한 수많은 유무형의 도구에 의존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능과 의식을 논하기 시작하니 망치, 바퀴, 전구 같은 '물건'은 즉각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가령 바퀴는 이동성을 크게 증대시킴으로써 교류, 권력, 문명 등 여러 차원에서 인간의 인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결국 인간과 모든 유무형적 도구의 관계는 또 하나의 공진화 관계라 할 수 있다.
난 방금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의식의 내면화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럼 오늘날 사이보그 1의 의식은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 볼 문제다. 답은 높은 확률로 아니올시다다. 앞으로 어떤 도구가 탄생하는지, 그 도구와 인간이 어떻게 융합할 수 있는지에 따라 뇌의 한계는 계속해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높은 확률로 뇌는 시험을 차례대로 통과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갈 것이다. 묵독이라는, 이제는 공기만큼이나 자연스러워진 발명품이 인간의 경험과 존재 양식을 질적으로 어떻게 확장시켰는지 다시 한번 <갈대 속의 영원>을 통해 곱씹어 보자. 단순히 읽는 행위가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라면 과학기술이 엄청나게 진보한 시대에는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나 가는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실은 자기 옆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주교는 다른 세계로 달아나 있으며 움직이지도 않은 채 찾을 수 없는 곳을 여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장면은 당황스러웠으며 동시에 그를 매료시켰다.
- 이레네 바예호, <갈대 속의 영원> 73p
난 줄곧 인공지능을 먼 미래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인간들이 그렇게 쉽게 인간성을 포기하겠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A)와 (B) 같은 원시적인 형태의 인공지능밖에 떠올리지 못했고 결국 인공지능이 정말로 뭔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핵심은 (C) 연결/결합/융합인 듯하다. 저자가 알려준 도구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 각종 도구와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 결합의 구체적인 형태--가령 화학적인가 물리적인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도구가 탄생하고, 그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또 다른 도구가 더욱 정교해지고, 인간과 모든 도구의 결합 방식이 다양해지는 동시에 원활해지고, 끝내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마저 가능하게 된다면 '인간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새롭게 정의될 것이다. 정말이지 엄청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엄청나다는 것은 사회망에 연결된 이에게는 엄청난 축복, 배제된 이에게는 엄청난 악몽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또는 많은 격차를 초월(극복)하는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도구 혹은 점들을 준비해두고 있으면, 어느 날 거대한 목적이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임시적 연결을 강조하면서, 끝없이 변해가는 망 속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 강국진,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176p
댓글
오렌지 |
7개월 전
우리가 도구 혹은 점들을 준비해두고 있으면, 어느 날 거대한 목적이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 저도 이 문장이 확 하고 와 닿았습니다. 삶(시간)이란, 누군가, 특정인의 의도대로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문장이었어요. 저자나 저, 시밤님의 희망처럼, ai가 윤택한 미래를 만들어내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