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하는' '사람의' '미래' - 나는 '왜' 책을 읽고 있을까? (일부 수정)

2411 시즌 - 책 <읽지 못하는 사람의 미래>

자장가
2025-01-23 07:02
전체공개

종이책으로 읽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니 (당연하게도)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히 전자책이 나와있어 출퇴근길에 TTS로 다시 들어본다. M사에서 제공하는 'AI TTS'는 성우가 읽어주는 오디오북 보다는 못하지만 다른 전자책 회사의 한글 TTS보다는 상당히 나은 편이다. (역시 AI 만세다.) 그제서야 읽었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독후감을 쓰겠다고 전자책을 다시 읽는다. 다 이해하고 지나갔던 내용들인데 여전히 책을 충분히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책을 읽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밀도가 높은 책은 늪을 걸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멈춰가면서 읽어야 하는데, 길을 따라 트래킹을 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읽어 나갔던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고,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논리적 검토와 계량적인 분석을 통해 '답 혹은 해결책'을 찾는 일을 주로 그리고 오랜동안 해왔다. 정교한 논리 구조와 이를 증명하는 수치가 있으면 최적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내게 일을 부여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요구했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꽤 잘하는 편이었다. 아쉽지만 문과 출신이어서 복잡한 함수를 사용하는 수학과 과학에서 종종 막히곤 했고, 아마 그것을 잘하게 되면 '답'을 더 잘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사회물리학 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런 접근법은 어떤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고 있었고, 그것은 명시적이건 묵시적이건 '의도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훈련'받고 있던 교육 시스템과 '사용'되고 있던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업무 시스템에서 주로 사용했던 앎에 대한 접근 방법의 편향성 때문이었다.

앎의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 볼 수 있다. 힘으로서의 앎을 추구하는 길과 성찰로서의 앎을 추구하는 길. 전자는 근대과학으로 이어졌고, 후자는 인문학, 측 철학과 역사와 문학으로 계승되었다. 책을 읽는 목적도 비슷하게 나눠볼 수 있다. 힘의 확장으로서의 읽기와 성찰로서의 읽기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면서 많은 시간 동안 책을 읽어왔지만, 그 대부분은 '힘으로서의 앎'을 위한 독서가 중심이 되어 왔다. '수단, 도구, 계산, 효율'을 목표로 하는 독서는 그 방법 또한 목표를 닮아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다가 잠시 멈추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야하는 독서를 부담스러워한다.
시간이 지나서 사회적으로 조직과 직원과의 관계맺음의 방식이 달라지고, 개인적으로도 업무에서 결정을 해야하는 일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이전에 무시하고 지나갔던 부분의 공백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상황이 되고 있다. 경영에서도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것이 트렌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트렌드는 여전히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다. 인문학을 힘으로서의 앎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이상, '타인을 향한 앎'과 '자신을 위한 앎'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표백되어 버리기 쉽다. 자본주의 체제는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숫자를 분석하고, 법과 제도를 검토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비슷한 일을 할 것이다.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 꿈꾸고 있지만 나의 결심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해와 동의를 얻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어서 언제 현실이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나의 독서도 여전히 그런 맥락에서 '수단'이 되고 있지 않은가를 다시 생각한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AI와 관련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망록처럼 생각하는 것을 적어 두는 정도가 맞을 듯하다.

몇 가지 이야기들이 있는데, 첫째는 AI가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 둘째는 인간과 다르지만 고유한 지적 능력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통해 인간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는 것, 셋째는 인간이 AI에 의존 또는 종속되게 될 것이라는 것 들이다. 첫째와 둘째는 '비교'하고 있고, 셋째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두 관점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그 중 둘째와 셋째 주제에 관해서는 이번 독서를 통해 체계적으로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셋째 주제는 이전에 주로 이야기하던 'AI가 인간을 대신할 것인가'와 맥락이 다르지만 더 근본적이고 수긍이 가는 내용이어서, 앞으로 계속해서 사용할 생각의 틀이 될 것 같다.

첫째 주제와 관련해서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결론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그것이 어떤 기제로 발현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여전히 다양한 가설적 설명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AI는 근본적으로 '기존의 DATA'를 대량으로 학습(주로 통계적 상관관계를 의미)하여, '사용자의 프롬프트'에 반응하여, '문서와 미디어'와 같은 형태로 대답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도 없고, 따라서 '목적 의식'도 없으며, '돌연변이'를 통한 변화도 없다. 그래서 '사람'(이런 맥락에서는 인간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이 가진 '사고능력'을 가질 수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진화적 사고를 수용한다면 '인간' 역시 처음부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문화와 기술을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만드는 것이 대단히 복잡한 생화학적 작용의 결과 일 수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어쩌면 인간 역시도 유전자에 내재된 어떤 '프롬프트'에 대응하는 대단히 복잡한 '반응기계'라고 생각한다면 AI와 본질적인 차이는 없지 않을까? 혹은, 혹은 AI가 '로봇 3원칙'과 같은 근본적 지시 프롬프트를 획득하고(누군가가 주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AI가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객체를 주어 스스로 실행을 통해 데이터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게 된다면, 그때는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일까?

참고로, 얼마 전 유시민 작가가 쓴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책에서 기억나는 부분 중 하나는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유전자의 목적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생존기계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전자는 다양한 기계를 만들어 생존에 성공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대단히 복잡한 생존기계다. 우리는 개인으로 그리고 때로는 집단으로 생존경쟁을 한다. 다른 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겉보기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보면 자연선택은 유전자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
적어도 나는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내가 유전자의 생존기계라는 사실을 감정 없이 받아들였다. 사실은 도덕이 아니다. 가치도 아니다. 그저 사실일 뿐이다. 내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지 알아서 기뻤다. 도킨스의 이론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인문학 이론 중에 그 정도로 '그럴법한 이야기'는 없다.

이하는 책의 제목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생각나는 것들이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언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잃어버리거나 사라져서 '중요해져 버린' 경우일 때가 많다.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고, 그 이야기를 공감을 하면서 듣는다. 이는 책읽기를 이미 잃어버리고 있고, 그것을 돌이키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상황임을 함께 인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손쉬운 방법들을 끊임 없이 개발하면서, 애써 '학습자의 수고와 인내를 동반'하는 책읽기는 불편하고 불필요한 일이 되었고, '주의 경제'라고 불리는 지금의 자본주의에서 개인이 책을 읽는 것은 더욱 수고스럽고 어려운 일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책에서는 쓰기와 읽기라는 '기술'이 가지는 의미와 그것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 주는 효과를 여려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을 읽는 주체는 각각의 개인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효과가 귀속되는 것도 원칙적으로 개인이 될 수 밖에 없겠지만, 결국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문화와 역사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 '사람'이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혹은 '인류'가 주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
미래는 현재와 연결되어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는 어느정도 결정되어 있거나 거의 거스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은 대부분 그렇게 도래할 미래를 어떻게 대비하고 어떤 이익을 얻을 것인지 이야기한다. '도구적 앎'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다. 이 책은 미래에 예견되는 '위험'을 경고하고, 그것이 도래하는 것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하고 싶은, 피할 수 있는 미래는 그런 점에서 '현재'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전자책 TTS에 대해 아쉬운 점 하나.
책 읽기에 따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욕심에 비해 부족한 사람들에게 전자책 TTS는 꽤나 유용한 수단이다. 요즘의 TTS 앱(특히 AI를 적용했다고 말하는 TTS)은 목소리나 억양이 많이 개선되어서 내용을 따라가는 데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어에 한자 혹은 영어가 병기되어 있는 경우나 본문 중에 역자가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둔 경우(역자주)에 TTS는 어김없이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쉼 없이 읽어버린다. 저자(역자)의 친절함이 독서에 과속방지턱이 되어버린다.
책읽기 앱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그걸 모를리는 없을텐데 AI에게 그걸 학습시키는 것이 기술적으로 무척 어렵거나, 주어진 개발 예산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냥 모르고 있는척 하는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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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오렌지 | 2개월 전

사람들이 무언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잃어버리거나 사라져서 '중요해져 버린' 경우일 때가 많다.
서글픈 감상을 주는 문장입니다. 읽기를 잊지 않기 위해서, 즉 도구적이지 않게 시간을 활용해야 탄생하는 진정한 의미의 휴식을 위해서 우리는 매우 정교한 근거를 공부해야만 하는 세상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의 북클럽이 사피님들에게 있어 (통상의 일정과 같은)어떤 결과와 평가보다는, 함께 시간을 일구었다는 행복감으로 남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