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일본에서 열리는 RubyKaigi, 그리고 TRICK 코너

2503 시즌 - 책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독후감

내이름은코난
2025-04-23 01:13
전체공개

지난주 일본 마츠야마에 다녀왔다. Ruby(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자들의 컨퍼런스인 RubyKaigi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Ruby 뒤에 따라붙는 Kaigi 는 일어 かいぎ (회의)를 영어 발음 그대로 쓴 것이고, Ruby 컨퍼런스라는 뜻이다.

2006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이 행사에는 전세계의 Ruby 개발자들이 모여든다. 이번 해에는 1500명이나 참가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각국에서 열리는 RubyConf(Ruby Conference) 와 유럽에서 열리는 EuRuKo(European Ruby Conference)등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먼 일본에서 열리는 RubyKaigi에 꽤 많은 개발자들이 모이는 편이다. 왜 그럴까? 일본이 Ruby가 탄생한 고향이기 때문이다. Yukihiro Matsumoto 라는 일본인 개발자가 Ruby를 만들어 1995년 세상에 공개했고, 지금도 일본에서 Ruby 개발을 주도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일본 컨퍼런스는 더욱 의미가 깊다.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의 독후감을 생각하고 있을 무렵에 참가했기 때문에, RubyKaigi의 의례적인 모습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 중 가장 독특했던 것은 다른 기술 컨퍼런스에서는 보지 못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바로 1시간 동안 진행된 TRICK 코너였다.

TRICK 에는 '장난', '재주'라는 뜻이 있다. 이 코너는 "現世利益のない、意味不明な Ruby プログラムを書く" 번역하자면 "현실에 아무 이익도 없는, 의미 불명의 Ruby 코드를 작성"하여 경쟁하는 콘테스트다. 이 독특하고 재미난 코너에서는 1시간 동안 수상작들의 코드를 설명하며 시연한다. 1500여명의 개발자들은 같은 공간에 앉아 참신한 코드들에 감탄하기도 하고 함께 폭소하기도 한다. 결과물을 보자면 정말 현실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었는데 아마 그럴수록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 같다.

본래 프로그래밍 언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다. 그러나 TRICK 코너는 그 편견을 뒤집어 버렸다. 왜 그 시급 높은 1500여명의 개발자들이 한 공간에 앉아 도합 1500시간을 낭비하는가? 실용적인 해법을 얻고자 바다 건너 이 컨퍼런스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는가? 또 나는 왜 3일간 들은 21개의 코너 중 이 코너가 가장 가슴 깊이 남았는가? 그것은 바로 가장 '의례'적인 코너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의례적인 동작은 외부 세계에 실제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우리가 그것을 의례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다.” 실은 명백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행하는 의례는 많은 종교 공동체에서 대개 마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말은 의례에 기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 그것은 사회 구성원에게 신뢰를 주고, 불안을 제거하고, 사회 조직을 단련한다."

-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그렇다. '의례'란 세계에 실제적인 결과를 낳지 않고, 실용적인 목표와 인과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TRICK 코너는 Ruby 언어의 철학과 본질을 공고히 다지는 '의례'로 보인다. Ruby는 독특하게도 프로그래머의 행복을 위해 설계된 언어이며 '컴퓨터 중심 언어' 가 아닌 '사람이 중심인 언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Ruby 공식 사이트에 가면 상단에 'A Programmer's Best Friend' 라고 적혀있는데 '프로그래머의 단짝 친구' 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TRICK 코너는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프로그래머의 즐거움'만을 극대화해서 보여준 것이다. 어떤 것을 강조하려면 때론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덕분에 그 의례에 참여한 개발자들은 Ruby의 철학을 온몸으로 느끼며 Ruby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이 커지게 된다. 

물론 Ruby 언어가 프로그래머의 재미만을 위해 탄생한 건 아니다. 다만, 프로그래머가 즐겁게 개발할 수 있어야 생산성도 올라간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I hope to see Ruby help every programmer in the world to be productive, and to enjoy programming, and to be happy.
저는 루비가 세상의 모든 프로그래머들이 더 생산적이고, 프로그래밍을 즐기며,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Yukihiro Matsumoto

어째, 가장 쓸데없는 코너가 RubyKaigi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코너로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의례'의 힘인가?



p.s) 여러분이 사용하시는 이 홈페이지도 Ruby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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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또박사 | 27일 전

대만의 오드리 탕도 루비를 애호하는 해커라지요. 그럴 경유해 루비 커뮤니티 회원들의 대화가 담긴 블로그를 본 적이 있어요. 직접 보고 오셨다니 근사하네요. 만나서 그 경험을 더 듣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