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의례를 기다린다

2503 시즌 - 책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독후감

짜장가
2025-04-2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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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진지하고 성실하게 물어본다. "너 이거 어떻게 된 건지 잘 몰랐지? 사실은 말이야......"

학교에 가면 운동장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서 '국민체조'를 하고, 해질 무렵이 되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교실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도록 했었다.
동네 형들은 어느 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소한 물건을 훔쳐오게 하는 '담력' 훈련을 시켰고, 다니던 사찰의 학생회에서는 밤새 1080배를 하고 좌선을 하는 '용맹정진' 법회를 매년 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동문회에서는 신발에 술을 부어 주면서 '근성'이 있는지 알고 싶어 했었고, 훈련소에서는 같이 입대한 동기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기를 끝도 없이 하도록 했었다.
조직 내의 서열을 구별하는 법, 회의할 때와 단체 사진 찍을 때 자리를 배치하는 순서를 배웠고, 다양한 상황에서 술을 따르고 받고 마시는 방법을 배웠고, 장례식장에서 상황에 따라 고인과 상주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 지를 배웠다.

저자는 말한다. "그 모든 것들이 '의례'라고 할 수 있거든. 그 의례라는 것은 '사용자가 불분명한 수단을 통해 바람직한 결과물을 얻게 해 주는 정신적 도구'이면서, '집단 경험과 상징적 의미를 공유하는 하나의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사고와 기억을 조화롭게 해 인간 집단이 단일한 유기체로 기능'하게 하는거야."
음... 그렇게 정교한 설명 방식으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여튼 그렇게 나는 '거기'에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거기'에 '함께' 있기 위해서 필요하고 요구되는 일이었고, '실수'하면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의례'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더 근본적으로 나는 '의례'를 만들어 내는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그 곳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을까? 사람들이 달라지고, 사회와 기술, 생활 수준과 살아가는 방식이 변했지만 상당수는 그대로 혹은 조금은 달라졌지만 비슷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의식은 길고 무자비한 문화적 선택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온 생존자'이기 때문이고, '의식은 우리가 연대하고 의미를 찾고 누구인지를 알도록 돕는 인간 본성의 원초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의례적인 종'이기 때문이다.
본성의 원초적인 부분이라면,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쉽게 고치거나 없앨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의식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공유되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더 이상 '금줄'을 집에 두르지는 않지만, 산모는 미역국을 먹고, 돌잔치를 한다. '길일'에 이사와 결혼이 몰리고, 내가 살았던 아파트들에는 4호가 없다. 빨간 펜으로 사람 이름을 쓰면 실례가 되고, 문지방을 밟으면 안된다. '3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사십구재를 치른다.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애완견을 화장한 후에 유골을 수습하고서는 무언가가 그 황량한 곳에 남겨질까 싶어서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라고 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지만,성인이 된 이후엔 대도시에서 살아오고 있다. 많은 것들이 변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급속한, 전격적인 변화 속에서 '의례'가 우리를 지켜주기 보다는 '억압'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의례'는 기본적으로 '고도로 짜여지고, 공식화되고, 정확하게 집행'되는 것이어서, 새로움을 회피하고 정확성을 강조하는 경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이 그렇듯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정서적 의식은 종종 이념적 색깔로 칠해지고 광신주의와 외부인을 향한 적대감을 주입하는 데 이용'되는 경우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 '의례'를 통해 소속될 집단이 사라지고 있거나, 사람들이 '집단'에 소속되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경사회를 유지하던 혈연의 힘이 약해지고, 직장에 대한 소속감은 냉소의 대상이 되고, '각자도생'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의례'들이 사회의 변화에 '저항'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점점 사라져 갔다.

그럼에도 '의례'는 필요하고, 존속될 것이다. 단지, 의례의 힘에 의지하려는 사회공학적 시도는 실패할 공산이 클 뿐이다. 최근의 사례를 보면서 사람들은 세대를 불문하고 여전히 새로운 의례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놀라운 마음으로 확인한다.
각각의 아이돌의 팬임을 확인하기 위해 구매했던 '응원봉'이 느닷없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위한 장치로 등장하였다. 추운 날씨에 밖으로 나섰던 아이돌 '덕후'들은 서로 다른 응원봉을 들고 나온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경험을 공유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새로운 '의례'가 만들어졌고, 이들의 자신과 집단간 경계가 흐려지고, 서로가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촛불'이 '응원봉'으로 변하는 축제의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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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또박사 | 27일 전

의례에 대한 의례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 아닐까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