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글쓰기는

2503 시즌 - 책 <쓰기의 미래> 독후감

아이사갈까말까
2025-05-21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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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나의 글쓰기는 대체되고 있다. 나의 뇌가 대체되고 있다. 회사에서 작성하는 이메일과 회의 요약, 보고서는 GPT 가 늘 검토한다. 회의 때 나눈 이야기 몇 마디, 몇 개의 단어를 적으면 AI 는 멋진 회의 노트를 만든다. 맞춤법과 철자와 문장의 가독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 머리에서 생각나는 말들을 키보드에 그대로 쏟는다. AI는 공손한 이메일을 작성해낸다. 나의 글쓰기, 나의 사고력은 대체되고 있다. 저자가 우려하는 인간중에 하나인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효율성을 버리지 못한다.

반면에 창의성과 진심을 담은 글쓰기,는 대체되고 있는가? 책은 AI가 또다른 작가를 생성 (또는 작가를 보조)할 뿐  창의적인 글쓰기를 하는 작가를 대체하지는 않는듯 얘기한다. 인간 작가는 창의적인 글을 쓰면 된다. 인간 작가는 진심을 담은 글을 쓰면 된다. AI도 그런 글을 쓸 (또는 보조 할) 뿐이다. "식탁에는 늘 더 많은 여유 공간이 남아 있다. 당신이 지나치게 부자여도, 지나치게 말라도 문제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단편소설, 소설, 혹은 시가 문제 되는 경우는 없다. 게다가 쓰기라는 창의적인 행위의 첫째가는 수혜자는 대부분 작가 자신이다 (p 480)" 그러나, 인간이 창의적인 글을 한편을 쓸 때 AI가 또다른 창의적 글을 100편 써서 출판하면 인간 작가는 시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하는가. "그럼 그만큼 그 인간 작가가 창의적이고 독창적이지 못한거지!" 이런 대답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냥, 글쓰기나 다른 예술 행위가 더 이상 숭고하거나 고상한 일 또는 취미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인간 고유의 것도 아니다. 이런 현상때문에 세상을 회의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냥 그렇게 됐구나, 생각 할 뿐이다. AI 도 글을 쓸 뿐이다. 누가 더 잘 쓰고 못 쓰고, 구분이 그래서 점점 사라지지 않을까. 사람이 써내는 글보다 AI가 생성 (그리고 편집)하는 글이 많아지면, 사람이 써낸 글을 읽을 일 보다 AI가 생성 (그리고 편집) 하는 글을 읽을 일이 더 많아지겠지. 인간은 "인간이 쓴 글"보다 "AI가 쓴 글"에 익숙해지고, 그 때 가서는 어떤 글이 더 잘 쓰고 못 쓰고 구분이 사라질 것 같다. 우리는 그냥 즐겨야한다. 글쓰기를 즐기고, 하고 싶은 말을 써야 한다.

내 기억속 나의 첫 글쓰기는 어느 1990년대 밤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낸 첫 글쓰기였다. 초등학교 4학년 또는 5학년 어느 평일의 밤이었다. 그날 밤 부모님은 유독 시끄럽게 다퉜고, 나는 겁에 질려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무언가 치는 소리, 무언가 던지는 소리, 나는 왠지 모르게 밖에서 나는 소리보다 크게 울면 안된다고 느껴서 오른 팔을 앙 물고 울었다. 얼마 뒤 아빠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며 분위기를 한 층 더 격앙시켰을 때, 나는 그 날이 아빠를 보는 마지막인가 생각했고, 아빠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는 "글"을 썼다.

내 이야기에는 가명의 아빠가 등장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껴 집을 나가 멀리멀리 걸어간다. 그는 어떤 예쁜 마을에 도착해 그곳이 안식처임을 느낀다. 며칠 숨을 돌리고 여유가 생기자, 그는 그 마을에서 아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옆집 김씨 아저씨, 아랫집 박씨 아저씨, 동네 슈퍼 최씨 아저씨, 등등등... 가명의 아빠와 김씨, 박씨, 최씨 그 외 등등 아저씨들은 서로를 공감하고 위로한다. 사는 게 다 똑같구나 누가 특별히 행복하게 사는 건 아니구나, 를 깨닫고 가명의 아빠는 아내와 자식들을 그리워한다. 그는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대충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습장에 썼다. 그렇게 울다 쓰다 잠들었다. 초등학생의 나는 그 때 왜 글을 쓰고자 했을까. 방문을 열고 뛰어나가 집을 나가는 아빠를 붙잡는 대신에 왜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글을 썼을까. 아빠 가지마. 나의 의도는 명확했는데 그것은 왜 두 발이 움직이는 대신 두 손이 움직이는 글쓰기로 이어졌을까.

만약 그날 GPT가 있었다면 나는 재빨리 아빠를 설득하는 동화를 만들어줘, 프롬프트를 넣었을까? AI는 더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동화를 만들어줬을 수 있었을테지만 아마도 나는 계속 뚝뚝 연습장에 눈물을 흘리며 내 손으로 아빠에게 글을 썼을 것 같다. 음, 아니..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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