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열정을 추구할 것인가
늘보리
2024-05-2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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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에 드러나듯 인간의 이성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확인하려는 욕망을 자극했고, 이는 주로 세계를 통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왔다. 불확실한 자연을 경외하던 마음은 자연을 인간의 통제 하에 둠으로써 피해가 될 만한 변수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경로를 바꾸었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기 이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적극 활용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이같은 노력이 인류의 번영과 안녕에 일부 기여하기도 했지만,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크고 작은 갈등과 대립, 불통은 물론, 나날이 체감도가 높아지는 기후위기까지 초래해 인류는 물론 지구생태계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지적 욕망에 제동을 걸지 않았을 때 초래될 수 있는 위험들에 경고를 날림과 동시에, 인간의 감각, 감정, 열정, 사랑 등의 정념을 다른 시각으로 고민할 수 있게 해주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존경하는 스승인 발트만의 말( “천재들의 노력이란 아무리 빗나갔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확고하게 유익한 쪽으로 방향을 틀게 마련이지.”)을 듣고 자신의 학문적 욕망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자신이 갈고닦은 과학 지식을 토대로 인간을 창조하는 단계에 이르는 동안 그는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마저 소홀히 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랑에서 빗겨난 상태로 연구에 매진했고, 애정이 결핍된 채 이성과 논리에 경도된 마음 상태로 연구 과정에서 내린 결론들이, 그 선택의 결과물이 세상에 이롭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관된 것들은 모두, 나다운 습관을 죄다 삼켜 버린 엄청난 과제가 끝날 때까지 미루어 두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이 하는 연구 때문에 당신의 애정이 엷어지고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에 무감각해진다면, 그 연구는 분명 불법적인 것, 다시 말해서 인간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뒤에 그가 덧붙인 말은 살짝 웃음을 자아냈다. “오직 내 목표가 주는 힘만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작업은 곧 끝나겠지. 그리고 운동과 오락을 즐기다 보면 아직 초기 단계인 병을 물리치게 될 거야. … 그리고 이 창조 작업이 끝나면 그 두 가지를 하기로 스스로 약속했다.” 아무리 목표지향적이어야 할 상황에도 ‘운동’과 ‘오락'은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몇 백 년 전의 소설 속 인물도 했다는 게 신기했다.
결국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은 창조자 스스로도 놀라서 도망칠 만큼 끔찍하게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괴물은 가슴 깊은 곳에서 사랑을 갈구했고 곤경에 처한 인간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도왔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명과 구타, 위협뿐이었다. 자신이 목격한 가장 사랑스럽고 따뜻한 가족들에게마저 모멸을 당했지만, 정작 자신을 만든 프랑켄슈타인은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의 굴레 안에 있는 것을 보고는 분노하며 복수를 결심한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프랑켄슈타인의 입장에서 서술되기에 읽는 내내 괴물의 복수 행각이 도를 넘었다고 ‘막연히’ 느껴졌다. 마지막에 괴물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인간의 이성은 시각 자극에 치중된 외양이 일으키는 감각 반응과 그에 따른 자연스런 감정, 특히 혐오감에 취약하기만 했다. 엄청난 지식을 쌓은 프랑켄슈타인도, 사랑과 정의를 지키다가 프랑스에서 추방되어야만 했던 독일 농가의 가족들도 모두 그의 끔찍한 외모만 보고 저주를 퍼부었다. 괴물의 선한 의지와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철저히 짓밟혔다. 괴물이 어린 아이를 보고 아이들은 아직 배우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가졌으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리라 오판한 부분은 강력한 메시지를 주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선천적인 것으로, 인간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편견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은, 교육은, 문화는 선천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을 사회의 테두리 안에 끌어들이고 같은 성원권을 지닌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쓰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미적 감각과 이에 연동된 감정적 판단이 선천적이라면(아기들도 소위 예쁜 사람들을 알아본다…), 낯선 존재들을 더 잘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프랑스에서 추방된 가족의 노인이 장님으로 설정된 점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시각적인 요소가 사라지자 편견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괴물과 대화를 나누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일이 가능해진다. 인간이 보다 지혜롭게 대처하고 더 넓은 범주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지배적인 감각 수용체를 마비시켜야만 하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다른 외모와 정체성 때문에 혐오를 감당해야만 하는 이들이 떠오른다. 새로운 감각들을 다양하게 수용하는 법을 지식으로 학습하여 변화시킬 수 있진 않을까. 물론 지식이 문화가 되고 삶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다양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과의 접점이 늘고, 최소한 이들의 목소리가 ‘정상성’의 논리에 갇혀 묻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만남과 대화가 필요하다.
커밍아웃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여러 반응을 거쳐 상반된 결과에 이른다. 동성애자인 자녀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더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사람, 반대로 자녀는 물론 동성애자 전부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사람.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서는 자녀의 커밍아웃 이후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울고 웃고 연대하고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맞서 싸우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프랑켄슈타인과 월터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심과 열정을 미지의 대상(자연)을 정복하는 데 집중한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의 부모들이 보여주는 열정과 새로운 세계(다양한 성정체성)를 알아가려는 노력은 비슷한 에너지를 품고 있지만 다른 양상을 띈다. 프랑켄슈타인의 열정은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불태우는 느낌이라면, 성소수자부모모임 성원들의 열정은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긴 은은한 불로 주변에 온기를 드리운다. 인류의 지식이 진정으로 모두에게 이롭기 위해서는 후자로 많이 이동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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