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의 주체가 되기
현경
2024-07-1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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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맞벌이셨던 부모님은 방과 후 밤 늦게까지 혼자인 외동딸을 무척이나 걱정하셨다. 핸드폰이 많이 보급되어있지 않던 시절이지만, 퇴근 전까지 나와 연락하시기 위해 당시 최신이었던 ‘걸리버’라는 이름의 폴더폰을 사주셨다. 전화, 문자 등 간단한 통신 기능이 전부 였지만 부모님의 불안과 걱정을 덜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나 또한 매번 집에 전화를 걸러 들르지 않아도 되어 어딜 가든 마음이 편안했다. 친구들에게 놀이터나 분식집에 가자고 먼저 제안하고, 각자 부모님께 연락 드리라며 핸드폰을 빌려주는 멋진 친구가 되기도 했다.
지금의 스마트폰은 그 시절 기능과는 비교가 안된다. 터치 한번으로 영상통화가 가능하고 세상 모든 이야기와 컨텐츠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 걸리버의 전화 한통 만큼의 만족감은 주지 못하는 것 같다. 쉴새없이 SNS 피드를 확인하고 업데이트 하지만, 연결감에 대한 만족감은 커녕 따분할 뿐이다. 남들은 다 아는, 나만 놓치는 정보가 있지 않을까 불안감을 주기도 한다.
버스를 타던, 밥을 먹던 혼자인 시간에는 유튜브 영상을 본다. 하나의 영상이 끝나면 다음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하나의 영상이었던 것 처럼 자연스레 이어진다. 우리는 하루 평균 150번의 ‘선택’을 한다는데, 알고리즘은 고맙게도 그 번거로운 선택의 과정을 줄여준다. 다음을 알려주고, 자동으로 재생시켜 준다. 그렇게 10분, 20분 유튜브가 정해준 컨텐츠를 보다보면 나의 일상이 결정된다. 무엇을 먹고 입을지, 어디로 여행을 가고 어떤 이슈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 할지, 나의 돈과 시간의 소비가 결정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한 달 만원의 비용으로 고민없이 정해지는 인생에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선택은 어렵다. 택한 바를 이행하고 지속하는 것은 더 어렵다. 이후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누군가 선택해준 대로 사는 것은 쉬울까? 그렇게 사는 것도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그 끝이 행복이 아니라면 받아들어야 하는 것일까? 모두가 대세라는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았다. 이 불편한 느낌은 뭘까. 단순히 남들과 똑같이 살기 싫은 것일까. 결론은 ‘내가 주인인 삶을 살고 싶다’는 정당한 요구였다.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고 싶다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작년 여름부터 나의 몸과 마음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내 안의 감정과 느낌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으려고 노력중이다. 나에게 맞는 운동이나 음식에 대해 검색을 하다보면 유튜브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알고리즘은 내가 고용한 큐레이터가 된다. 의심되는 내용은 책을 찾아본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나 주제에 관심을 보이는 전문성 있는 계정을 구독하고 팔로우 한다.
나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록 기존 모임이나 주변인들의 부름에 덜 참여하게 된다. SNS나 메신저 자체에 쓰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스스로 고립시키고 있는 것 같아 사회성이 줄어들고 있는 것인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평소 관심있던 북클럽에 가입하고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보니 걱정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첫 모임이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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