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다양성 충돌이 만드는 비효율로 생장한다

2407 시즌 - 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woply
2024-08-1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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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을 읽었을 때가 생각났다. 빅터가 만든 괴물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다양성의 마지노선을 넘었다. 괴물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고, 동시에 혐오와 거부의 대상이었다. 많은 이들이 다양성에 대해 관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성의 가치를 믿고,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허용할 수 있는 선을 넘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존중이라는 것도 나름의 범위가 있는 것이다. 인정할 수 없는 다양성이란 감정적 거부감이기도 하고, 신념을 흔드는 불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그 다양성을 의도적으로 충돌시키는 나름의 방법이다. 저자는 평화를 위해 충돌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이, 그리고 그 과정 너머에서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양성의 충격이 거부나 분노가 아닌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오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마음이 부서지는 순간과 이유는 뭘까. 어떤 방식으로 그 순간을 수용해야 할까. 몇 가지 질문이 더 떠 오른다. 나의 옳음과 남의 옳음이 충돌할 때 왜 마음이 부서질까. 상관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닐까? 화합과 결합은 너무 이상적인 말일까? 결국 조화라는 것도 누군가의 포기나 희생이 필요한 걸까? 조각난 마음들이 영영 바닥에 흩어져있지 않고, 더 크고 유연하게 재결합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다양성이 개인에게 주는 충격은 인간이 변화에 갖는 기초적인 반응이라는 생각이 든다. 변화는 불확실성을 만든다. 자연스럽게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신념이나 생각을 흔드는 다름은 자신의 세계에 또 다른 가능성을 예고한다. 실제와 상관없이 상상 안에서 실패한다. 그래서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마주하는 순간 진짜 갈등이 시작된다. 맞서 싸움의 용기가 아닌 나의 중심을 유지하며 다름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부서져 열린다는 저자의 표현이 시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차이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결합하는 과정은 효율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효율은 생명이 짧다. 닫힌계 안에서 최적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 효율인데, 환경이나 전제가 바뀌는 순간 효율은 힘을 잃는다. 문제는 그 효율에 맞춰 모든 게 조정되어 있기 때문에 효율은 그 즉시 취약함이 된다. 효율은 상황이 변하면 충격에 쉽게 무너진다.

다양성의 충돌은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혁신과 창발을 만든다. 인풋 아웃풋이 명확하지 않지만, 지속성을 갖는다. 결합의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깝게 늘어가고, 전방위적인 연결이 발생한다. 그래서 국소적 위기가 시스템 전체의 붕괴까지 이어질 확률이 낮다. 다양성의 충돌은 전략과 통제가 없기 때문에 비효율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창발과 혁신이 발생하며, 그 결과 끈질기게 살아남고 성장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쓴 안티프래질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나온다. 민주주의의 외부 충격은 서로 다른 생각일 것이다. 부서진 마음이 새롭게 무언가를 수용하고 창발을 만드는 계기로 작동할 때 의견 차이는 위기가 아니라 사회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가는 양의 되먹임으로 작동할 것이다. 히드라가 외부 충격에 더 강해지는 것처럼, 다양성이라는 외부 충격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전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생각의 차이는 더 넓게 작동하는 변화를 만든다. 나와 다름은 잠시 나의 세계를 흔들지만, 나와 같음만 있으면 시스템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뻔뻔스러움과 겸손함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뻔뻔스러움이란 발언과 충돌의 자유이며, 겸손함이란 수용과 존중의 태도이다. 죽은 것은 변화가 없지만, 유기체의 세포는 늘 역동적인 생명력이 있다.

변화에 대한 불안이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안정과 예측이라는 유전적 본능의 한계를 이해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가능성이 무수히 많이 펼쳐지는 다양성의 창발을 믿어보는 것도 부서져 열리는 마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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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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