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로 가야만 개인이 설 수 있는
왕밤이
2024-08-22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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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자들을 환대 할 수 있고 갈등을 껴안을 줄 아는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의 그릇이 넓어야 함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결국 그러한 민주주의적 의식이 개인의 평온, 안식을 극대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갈등을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친구와 싸워본 적도 없고 싸우더라도 친구가 서운함을 토로하는 수준에서 내가 수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일하는 과정에서도 갈등을 만들지 않게 오히려 내가 좀 더 해버리지 하는 마음으로 대응하면서 오롯이 혼자 감당하고자 했었다.
당장은 갈등이 없으니 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수용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까지도 감당하고자 하면서, 어느덧 그 상대방들을 혐오하며 피하고 있었다.
올바른 관계로 진전될 수 없었다.
대부분 이런 관계들은 친밀해지지 못한 채 흩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기에 특별히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와 외로움은 상존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들.
환대를 거부하고 갈등을 외면했던 삶은 아닌 척 했지만 쓸쓸했다.
그래서 스스로 내면의 혼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정말 별로인 내 모습도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마음부터 민주주의적 통합을 이끌어 나갔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서서히 다른 사람의 고통과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연대하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작 내 고통을 타인이 나눠갔고 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마음에 들어왔다.
내 마음은 그 사랑들이 모아져 더 커지기 시작했고 타인을 환대하고 갈등이 발생하는 지점을 피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었다.
어느덧 나는 불확실성의 마주침을 두려워 하지 않고, 같은 고통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웠다.
공동체로 이뤄나간 내 두 다리는 오늘도 한층 더 굳건해지고 마모되는 마음은 새로운 층위가 쌓이며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결국 그러한 민주주의적 의식이 개인의 평온, 안식을 극대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갈등을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친구와 싸워본 적도 없고 싸우더라도 친구가 서운함을 토로하는 수준에서 내가 수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일하는 과정에서도 갈등을 만들지 않게 오히려 내가 좀 더 해버리지 하는 마음으로 대응하면서 오롯이 혼자 감당하고자 했었다.
당장은 갈등이 없으니 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수용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까지도 감당하고자 하면서, 어느덧 그 상대방들을 혐오하며 피하고 있었다.
올바른 관계로 진전될 수 없었다.
대부분 이런 관계들은 친밀해지지 못한 채 흩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기에 특별히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와 외로움은 상존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들.
환대를 거부하고 갈등을 외면했던 삶은 아닌 척 했지만 쓸쓸했다.
그래서 스스로 내면의 혼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정말 별로인 내 모습도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마음부터 민주주의적 통합을 이끌어 나갔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서서히 다른 사람의 고통과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연대하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작 내 고통을 타인이 나눠갔고 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마음에 들어왔다.
내 마음은 그 사랑들이 모아져 더 커지기 시작했고 타인을 환대하고 갈등이 발생하는 지점을 피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었다.
어느덧 나는 불확실성의 마주침을 두려워 하지 않고, 같은 고통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웠다.
공동체로 이뤄나간 내 두 다리는 오늘도 한층 더 굳건해지고 마모되는 마음은 새로운 층위가 쌓이며 재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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