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듀오

새서울도련님
2025-08-26 23:57
요즘은 정말이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이러다 곧 임종을 맞이하겠다는 근본 없는 농담을 심심치 않게 한다.

이대로 혼자 임종을 맞이할 수 없단 생각에 시작한 이 인연찾기 마라톤도 벌써 반년째, 어느덧 요령이 붙어서 MBTI, 여행지, 취미, 주말 루틴, 가족 관계와 같은 뻔한 주제를 훑고, 양귀자의 『모순』을 시작으로 책, 영화, 음악 따위의 취향 영역으로 넘어가는 나만의 레퍼토리와 패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내가 소개팅을 하고 있는 것인지, 바쁘디바쁜 현대 사회인들을 인터뷰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지만, '중요한 건 확률이 아니라 시행 횟수와 기댓값'이라고 외치던 선배의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오늘도 약속 장소로 향했고, 택시 아저씨의 감각적인 운전 솜씨 덕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

천천히 조심해서 오시라는 짧은 메시지를 매너 있게 남기고, 유튜브를 열어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미래에 대해서 탐구하려는 순간, 눈앞에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숨을 헐떡이며 앉는다.

사진보다 훨씬 화려한 외모에 놀란 것도 잠시, 에어팟이 연결 해제되는 그녀의 아이폰 화면 위로 떠오르는 낯익은 앨범 커버에 심장이 쿵쾅인다.

바야흐로 다시 밴드 음악의 시대라는데, 왜인지 이 마라톤에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리스너, 그것도 내가 최애하는 실리카겔의 최신곡을 듣는 사람이라니, 역시 마케터셔서 시대감각에 뒤처지지 않으시는 걸까, 어쩌면 나는 차마 못 갔던 불교박람회까지 섭렵하신 트렌드세터이신 걸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가는 락페스티벌, 도서전, 영화제도 다 섭렵하셨겠지, 다양한 망상이 산발적으로 피어나 어느새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9월 해운대 앞바다의 비릿함이 코끝까지 다가올 무렵, 그녀가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네요" ― 분명 작고 아담한 스타일이라고 했는데, 힐 없이도 나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보이는 키며, 앨범 표지 때문에 외면했는지 전달받은 사진과 너무 다른 얼굴이며, 무엇보다 아직 약속 시간은 20분이나 남았는데 헐레벌떡 들어오며 사과를 하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짧은 통성명을 통해 우리가 우연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크게 민망해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결국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모나미 청년 앞에 다시 자리했다.

첫마디에 손녀까지 생각한다는 밈이 떠올라 부끄러워지면서도, 그래도 나는 9월의 부산에서 멈췄으니 건전하지 않았을지, 그녀는 南宮FEFERE의 가사가 "너희가 점유한 토지 위로"가 아니라 "너희가 전유한 토지 위로"인지 알았을지, 그 표현에 묘한 짜릿함을 느꼈을지, 혹시 이 경험으로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또 그런 몹쓸 망상들이 하나둘 떠오를 무렵 그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 주사위는 던질 때마다 독립시행이라는 선배의 말을 되뇌며 우리는 함께 반환점을 지난다.

---

10줄 소설 공모전 낙작입니다.
목록
댓글
더듬이 | 9일 전
와- 10줄 소설 공모전 수준이 얼마나 높길래 이런 작품도 떨어지나요. 괜찮아요. 위대한 작가들도 처음엔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어 상심하고 좌절할 뻔하지요. 힘내세요! 다음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근데 소설 같지가 않고 체험담 같네요. ㅎㅎ
이전 글
가장 철저하게 준비한 모임이 가장 아쉬운 모임이 되다
다음 글
어디 가는 길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