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은 언뜻 언뜻 가을 기운이 느껴진다.
9월은 9월인가.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 다음 날에도 무더위가 보란 듯 시위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이러다 또 어떤 변덕이 일어날까.
계절도 절기도 정체성 위기를 겪는 요즘이라 안심은 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그때그때 충분히 누릴 줄 아는 것도 삶의 지혜일 것이다.
'책 없는 세상'이라는 흥미진진한 주제의 글을 쓰느라 이런저런 글을 찾아 읽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교육에 관한 글을 한 편 읽게 되었다. 공유하고 싶어 내용을 발췌해 올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교양인과 철학과 교육
9월은 9월인가.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 다음 날에도 무더위가 보란 듯 시위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이러다 또 어떤 변덕이 일어날까.
계절도 절기도 정체성 위기를 겪는 요즘이라 안심은 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그때그때 충분히 누릴 줄 아는 것도 삶의 지혜일 것이다.
'책 없는 세상'이라는 흥미진진한 주제의 글을 쓰느라 이런저런 글을 찾아 읽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교육에 관한 글을 한 편 읽게 되었다. 공유하고 싶어 내용을 발췌해 올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교양인과 철학과 교육
우리의 지각 장치는 동기 부여 장치, 즉 우리의 욕구, 감정, 정서, 욕망과 상호작용한다.
이때 절제, 용기, 정의 같은 인격적 덕목들은 마치 여과기처럼 우리의 욕망이 인식에 도입하는 왜곡을 걸러내거나 상쇄한다. 혹은 왜곡이 제거된 렌즈처럼 가치의 세계,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 보게 한다. 인격적 덕목들은 가치의 세계를 우리에게 드러내며, 무질서한 욕망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바로 그 가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눈먼 자에게 시력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둬 선 자체보다 왜곡된 선의 겉모습만 집중하게 하는 욕망의 족쇄를 끊어내 태양 같은 선을 마주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격적 덕목에 지적 덕목들, 즉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와 이론적 지혜(소피아)를 추가했다. 후자는 철학(필로소피아)이 사랑하는 대상이다. 결국 우리의 욕망을 조정하고 균형을 올바른 중용에 맞추려면, 좋음이 진정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우리가 속한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한다.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전문가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 말한 인격적 덕목들은 개인이 (다양한 과학이 밝혀낸) 좋음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고 그것을 구현하지 못하는 행동과 태도를 유발하는 욕망에 복종하지 않게 해준다.
여기에 좋음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앎, 즉 실천적 지혜라는 지적 덕목도 필요하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여기서 교양인이 등장한다. 교양인이란 특정 학문의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별력 있는 판단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 모든 과학이 동일한 기본 설명 개념(목적인, 형상인, 운동인, 질료인)과 논리 구조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언어였다. 덕분에 각 특수 과학이 제공하는 부분적 시각이 아닌 전체적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과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철학은 이처럼 자기와 세계에 대한 통합적 시각을 제공한다.
오늘날 학문 분야는 초전문화해 각자 전문 용어, 도구, 설명 전략, 정확성과 성공의 기준을 갖게 되어,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모든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길 바라긴 어렵다. 우리는 바벨탑 속에 살고 있으며, 책임 있는 민주적 시민의식에 필요한 인식론적 자율성은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전문가들 손아귀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종교, 기업, 정당, 특정 웹사이트 등이 퍼뜨리는 이념의 지배는 논외로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과학 지식의 피라미드를 가교 기술로 확장해야 한다. 목표는 특정 과학의 지식을 정치인과 일반 시민에게 활용 가능한 형태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지적 가교의 기술은 오늘날 지극히 중요하다.
철학은 여기서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학은 현실과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합리적 정보를 토대로 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잘못된 그림을 허무는 데 필요한 분석적 기술을 얻게 해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는 철학이다. 이 철학은 전문 철학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그 엄밀성과 명료성의 존중을 배워야 하지만, 범위가 더 포괄적이고 대상 독자층도 더 넓어야 하며, 따라서 어느 정도 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흥미를 갖고 반응할 수 있는 언어로 쓰여야 한다. 가교 역할을 하는 철학 자체엔 특별한 교육과 훈련, 특별한 기술과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은 공공적이어야 하며, 학생들이 시민이 될 헌법(정치 체제)을 염두에 두고 발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육은 학생들을 자유로운 시민(자신의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고, 진실이든 허위든 전문가에게 종속되지 않는)이 될 수 있게 준비시켜야 한다.
교육은 사람들이 속한 사회에서 잘 살며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육은 삶이 빈곤해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좋은 것들에 적절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50세 정도가 되어서야 실천적 지혜가 발달한다고 봤다. 그때쯤이면 '이론'에 대한 노출이 이른바 '현실 세계'의 경험에 의해 발효된다. 그러니 교육은 거의 평생에 걸친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상으로 여긴 정치 체제는 대부분의 노동은 노예가 맡아 시민들은 평생 교육에 필요한 여가를 누릴 수 있었고 그 교육을 행복 증진에 활용해 진정 가치 있는 좋음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육적 관점에서 이는 교육이 학생들을 노동 세계에 대비해 '생산적'이고 고용된 사회 구성원이 되도록 만들 필요가 없음을 의미했다. 생산과 고용이란 바로 지금 우리가 (다소 근시안적으로) 교육의 주요 기능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사회와 현대 사회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다.
만약 로봇이 고대 노예가 수행했던 노동을 대신하는 날이 온다면 지혜롭고 풍요로운 여가 활용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더 중요한 교육 목표로 떠오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상의 삶을 위한 영원한 공식이 존재하며, 일단 그것을 발견하면 그 공식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완결'이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개념이다. 세계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가장 훌륭한 안내자인 방대한 과학 및 과학적 지식 체계들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스스로를 수정하며 오래된 그림을 새 것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결, 즉 과학의 종착점, 최종 그림, 최종 해결책이란 개념은 과학사, 과학사회학, 과학철학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과 모순된다. (정치적, 종교적, 기타) 이데올로기의 악덕 하나는 확실하고 최종적인 해결책, 우리 자신에 대한 최종적 서사라는 형태로 허위의 안락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그런 허위적 위안 없이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이의 선조라 할 수 있다. 그는 증거에 민감하고 현실에 집중하며, 우주 자체가 거대한 실험이며 우리가 그 안에서 의식 있고 생각하는 일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