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독존

더듬이
2025-09-13 21:36
석가모니가 어머니의 옆구리로부터 세상에 나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는 설이 있다. 불교의 가르침이 그런 신화적 일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거기에 섣부르게 토를 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그것을 현대인의 개인주의와 연결시키는 말을 들을 때면, 과연 그럴까 싶다.

"사회는 없다. 개인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대처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야말로 강자들이 만들어낸 신화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개인주의의 가정은 사실에 반한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개인이 아니다. 이인일체로 태어난다. 탯줄로 연결된 채로 태어나 사후에 분리된다. 사실은 태속에 있을 때부터 자아(엄마)에서 또 다른 자아(태아)가 생겨나고 돌봄 속에서 자라면서 둘이 교감하며 세상에 나올/내보낼 준비를 한다. 그런 후 때가 되면 누구나 연결된 채로 태어난다. 탯줄을 끊은 후에도 상당 기간 돌봄 속에서 지낸다. 그래서 우리의 연결 본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뿌리 깊은 것이다. 자라서는 그걸 다 잊고서 저 혼자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고 다 된 줄 알고 개인주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런 걸 두고 옛날 사람들은 배은망덕이라고 불렀다. 호모 사피엔스는 일찌기 협력할 줄 알았기에 성공했지만 이제 개인으로 불행해지고 있다.

열역학법칙에 관한 에세이를 한 편 읽었다. 열역학법칙은 물리학의 가장 근본에 해당하는 법칙으로 꼽힌다. 단순히 말해 만물은 열 교환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그 교환은 결국 엔트로피적 붕괴로 향한다는 논리다 . 이걸 필자는 인간 삶의 허무주의와 연결짓고 있다. 모든 노력은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엔 다 부질없다는 얘기다.
마치 아이가 모든 것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래서 삶은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구만리 같은 삶의 길목에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의욕을 잃고 포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과학의 '객관적' 진리에 빠져 그 근저에 있는 자기 주체를 잊은 결과다. 세상은 인식 주체와 무관하게 거기 그대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앎이란 인식 주체도 관여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활동이다. 엄밀하게는 인식 주체가 더(?) 결정적이다. 인식 자체가 주체가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이자 계속되는 과정이며 잠정적인 결과다. 주체는 세상과 '함께' (사실은 하나이면서) 인식을 형성한다. 여기에는 인식 주체 자신의 역할, 차지하는 몫이 있다.
과학자들이 우주를 어떤 법칙으로 알아내도 그걸 안다는 주체를 함께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 그저 대상화를 통한 일면적 인식일 뿐이다. 그걸 전부인 듯 (대개는 세상 걱정 없이 안릭 의자에 앉아서) 말하는 사람은 세계를 눈앞의 지구본처럼 내려다보는 '관람객' 같은 인식론에 빠져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도 세상 모든 것은 나와 연결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내가 곧 세상이며 세상이 곧 나라는 뜻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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