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기계, 인간

마틴
2025-10-07 09:49
인공지능의 위력은 똑똑함에 있는 게 아니다. 일관성에 있다. 입력된 절차를 그대로 틀림없이 철저히 관철한다는 데 있다. 수학, 공학 같은 논리의 수행에 강점을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일관성은 사물의 근본적 특성이다. 바위가 꼼짝 않고 한 자리를 고수하거나 강물이 가장 빠른 길로 흘러 내리려는 것과 같다. 시키면 곧이곧대로 한다. 그래서 그것은 엄청난 위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이 못하는 지경까지 관철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무엇을 지시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해진다. 기계의 위력이 클수록 중요성은 더 커진다. 큰 바위를 어디로 던지느냐에 따라 훌륭한 방어벽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 방향이 빗나가 여러 사람을 무참히 깔아 뭉갤 수도 있게 되는 것과도 같다.
사물(비유기체)와 달리  유기체는 일관적이지 않다. 상황에 맞춰 달리 대응하는 게 본질적 특성이다. 이것은 장점이지만 동시에 약점이 된다. (이쯤에서 메리 미즐리가 말한 '닫힌 본능'과 '열린 본능'을 떠올려도 좋다. 닫힌 본능일수록 사물/기계에 가깝고 열린 본능일수록 고등유기체/인간에 가깝다) 이른바 사물 같은 지구력(이 말 자체가 유기체에 해당하는 말이어서 사물이 지닌 지속성과는 다르다)이 부족하다. 지속되도록 하려면 인위적 장치나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변화에 대한 적응에 탁월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히 잘 맞추어 바꿔 대응한다. 이 말은 무엇이든 일관되게 변함없이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떨어진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일관성이나 끈기나 인내를 높이 살 때가 있다. (가치는 어려움과 희소성에 비례한다) 우직함, 한결같음, 믿을 만함이란 말은 다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호평이다. 반면 그래선 안 될 때 그런 끈기와 일관된 지속의 특성을 발휘하면 융통성이 없다거나 고집스럽다, 고지식하다, 꼴통이다, 등등의 말로 흠을 잡는다.

인생을 좀 살아 본 사람이 보다 젊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요긴하다고 생각되는 조언 하나는 인생을 긴 마라톤으로 보라는 것이다. 인생을 짧다고도 하지만 지나왔을 때 하는 이야기이고, 출발선에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인생이 생각보다 꽤 길다는 것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문득 알게 된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별별 상황(자기는 물론 주변으로 인한)을 다 겪게 된다. 산전 수전 공중전 그밖의 외전. 이 때 길러야 할 것은 삶의 갖가지 상황에 필요한 재능과 기예와 자산일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그 어떤 변화무쌍한 내용으로 닥쳐 오든, 그 모든 영광과 수모, 혹은 그 사이의 어줍잖은 것들을 마주하고서도 어쨌든 계속해서 종점(?)까지 견디고 이어 나갈 끈기와 인내다.
그런 끈기와 인내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나. 주어진 세상과 생에 대한 가없는 사랑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명절에 오랜만에 만난 20대 아름다운 조카를 보며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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