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라고,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진가를 체험하게 해주는 진지한 노력은 부족하다. 그것은 앞서 체험한 사람의 몫이다. 우리는 책다운 책 자체가, 독서 다운 독서 자체가 주는 예측 불허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혼란과 인내, 점진적 이해의 반복적 과정은 문학 교수들이 책 전체를 읽기 과제로 내줄 때 가르치는 것이다. 이해를 향한 이 행진은 ‘읽기’ 외엔 별다른 이름이 없다. 우리는 학생들이 독서의 어려움 속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고등교육의 교리가 된 진부한 말인 '학생들 수준에 맞춰' 접근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휘트먼이 말한 대로 해야 한다. 앞쪽 어딘가에 멈춰 서서 그들이 따라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문학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온 필자의 글에 깊이 공감하며, 여기에도 발췌해 옮긴다.
"혼란과 인내, 점진적 이해의 반복적 과정은 문학 교수들이 책 전체를 읽기 과제로 내줄 때 가르치는 것이다. 이해를 향한 이 행진은 ‘읽기’ 외엔 별다른 이름이 없다. 우리는 학생들이 독서의 어려움 속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고등교육의 교리가 된 진부한 말인 '학생들 수준에 맞춰' 접근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휘트먼이 말한 대로 해야 한다. 앞쪽 어딘가에 멈춰 서서 그들이 따라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문학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온 필자의 글에 깊이 공감하며, 여기에도 발췌해 옮긴다.
지난 15년 새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교사들도 아이들에게 예전처럼 책을 읽으라고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영상, 토크, 샘플, 클립의 시대에 살고 있다.
책을 읽는다 해도 다 안 읽는다. 문학 수업 시간에도 읽기 과제가 극적으로 줄었다. 미국 고교 영어 시간의 의무 도서가 연 3권을 밑돈다.
2007년부터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쳐온 나는 그 추이를 가까이서 봐왔다. 그와 함께 주의력이 서서히 침식되는 것도. 이젠 교실 전체가 폰을 보며, 결국 자기 교육을 AI에 외주 맡기는 모습까지.
기술 기업들이 주의 분산의 수단을 제공한다는 건 우리도 안다. 그런데도 비난은 젊은 독자에게로 돌아간다. 학생들이 읽지 않거나(또는 읽을 수 없어서) 소설 한 권을 가르칠 수 없다는 교사의 푸념을 듣는다. 필독서를 지정하면 뭘 하나?
지난 가을 주로 이공계 전공 32명 대학생 문학 수업을 맡으며 처음에 나는 긴장했다. 2024년 고교 졸업반을 대상으로 실시한 평가에서 3분의 1이 기본 독해 능력도 못 갖춘 것으로 나왔기에. 하지만 그 학기 말, 토니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쯤 학생들 의심했던 것을 나는 후회했다.
당대의 피상적인 지혜에 귀 기울인 것이 잘못이었다고 확신한다. 문학 교사들이 자신이 사랑했던 책들을 과제로 내주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잘못이다.
현재를 절망할 이유는 많을지 모르지만 문학 수업이 그 중 하나가 되어선 안 된다.
대학 문학 수업 풍경은 지난 50년 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앉아서 허먼 멜빌의 한 구절을 내려다보며, 문장을 소리 내 읽고, 은유를 헤아리며, 놀라운 언어로 자신들의 세계가 재구성될 때 느껴지는 가능성의 전율을 경험한다.
대학 시절 소설 한 권을 통째로 읽었던 가장 생생한 기억은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집어 들었던 순간이다. 2002년 유난히 따뜻했던 봄 밤, 나는 도서관 계단에 기대어 앉아 책을 펼쳤고 새벽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
거의 20년을 가르쳐 왔지만 지난 가을에는 전에 없던 걱정이 들었다. 나는 늘 길고 어려운 책을 지정해왔다. 신입생들에게 정기적으로 <등대로>를 가르치며, 때로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나 멀크 라즈 아난드의 <불가촉천민>으로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독서 감소에 관한 일화와 통계 때문에 불안했다. 게다가 내 자신의 약해진 집중력도 걱정스러웠고, AI 생성 에세이 생각에 불안해졌다.
한 학기에 400년 영미 문학을 개관하는 내 수업은 힘든 도전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독서를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오히려 내 접근법을 명확히 했다. 발췌문에서 발췌문으로 건너뛰기보다는, 시간 속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기로 했다.
한 작가에게 며칠, 때로는 몇 주를 할애했다. 논픽션과 소설, 그리고 장시까지 읽었다. 다 다룰 수는 없었다. 대신 한 권을 택해 진지하게 읽는 데 집중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을 가르쳤다. 작가의 대표작 너머로 그와 함께 머무는 것, 극히 다른 소설들을 통해 소설가와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
수업 초반 몇 주 동안 두 가지가 분명해졌다.
첫째, 학생들은 책을 읽고 있었다. 거의 모든 내용 혹은 대부분을 읽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주석이나 참고 자료 없이 난해한 구절을 찾아내도록 했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첫째, 학생들은 책을 읽고 있었다. 거의 모든 내용 혹은 대부분을 읽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주석이나 참고 자료 없이 난해한 구절을 찾아내도록 했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둘째, 학생들은 수업과 과제 밖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삶을 체험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금전적 보상이 따르지 않는 활동인 독서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들은 사실상 그 하루 한두 시간 동안은 자신의 삶을 되찾은 셈이었다. 자기 삶의 통제권을 되찾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자주 다루는 미국 문학이 바로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게 읽을 시간을 더 주기 위해 그들의 글쓰기 방식을 바꿔야 했다. 종전의 과제형 에세이는 폐지했다. 대신 수업 당일 주제를 내주고 제한 시간 안에 '즉석 에세이'를 쓰게 했다.
시간 제약 속에서 글쓰기가 주는 아드레날린과 스트레스를 맛보게 하고 싶었다. 실패를 감수하는,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원했다. 학생들은 안전장치 없이, 완충 장치 없이, AI가 작성한 지원 없이, 계획이나 논제조차 없이 두려움과 맞서야 했다.
시간 제약 속에서 글쓰기가 주는 아드레날린과 스트레스를 맛보게 하고 싶었다. 실패를 감수하는,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원했다. 학생들은 안전장치 없이, 완충 장치 없이, AI가 작성한 지원 없이, 계획이나 논제조차 없이 두려움과 맞서야 했다.
첫 즉석 에세이 후 한 학생이 약간 풀이 죽은 채 다가왔다. 자신이 기준에 미달했을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계획 없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글을 쓰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사실은 그게 바로 핵심이었다.
W. G. 제발트는 <아우스터리츠>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언어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경험을 묘사한다. 한때 유창하고 성공적인 작가였던 그는 갑자기 문장에 대한 믿음의 위기에 빠진다. 문장은 '기껏해야 임시변통의 수단,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일종의 병적인 성장물, 마치 많은 해양 생물들이 촉수를 이용해 우리를 둘러싼 어둠 속을 맹목적으로 더듬어 다니듯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학생들이 독자로서 겪는 어려움을 글로 써 보게 하는 주제를 떠올렸다: 하나는 '에밀리 디킨슨 시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 대해 써보라', 다른 하나는 '당신의 아침 일과를 포크너 스타일로 써보라'.
나는 서른 두 명의 새로운 포크너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학생들이 모방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이 뚫고 나오는 순간을 경험하길 바랐다. 포크너처럼 쓰려는 시도가 실패하며 네거티브 사진처럼 자신만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그 순간. 존 키츠는 이 상태를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이라 불렀다. 작가가 불확실성의 영원한 상태에서 살아가기를 배우는 조건이다.
학생들이 정말 책을 읽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책을 내밀고 마주하게 만드는 건 내 몫이었다. 어른들은 그저 젊은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지만, 그 가치를 보증하는 것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한 선생님은 내가 너무 어릴 때 톨스토이와 위고를 건넸다. 그때 이미 나는 독서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열세 살에 접한 책이라는 게 그렇고 그런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초반에 <전쟁과 평화>와 <레 미제라블>을 읽었지만 그 세부 묘사의 밀도에 완전히 당황했다.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천 쪽 짜리 소설들에 빠져들면서 독서 중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경험을 동시에 했다. 러시아 작가들의 기분 변화에 거의 중독될 지경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엔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내성이 생겼고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하기 시작하자 그 경험을 다시 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많이 읽다 보니 책은 조지 손더스가 말한 것처럼 '문'처럼 느껴졌다.
나의 미국 문학 수업에서도 비슷한 걸 목격했다. 문학에서나 삶에서나 첫인상은 믿을 게 못 된다. <월든>을 시작했을 때 많은 학생들이 소로의 뉴잉글랜드 부동산 시장에 대한 장황한 사색에 흥미를 잃었다.
두 번의 수업이 지나자 소로는 평생 친구가 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날카로운 지적은 시의적절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우리는 인생의 절반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월든은 자연으로의 주의분산에 자유롭게 빠져드는 책이다.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고 호기심 가득하며 기쁘고 분노하게 하려는 것이다. 소로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림을 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좌초한 헛된 현실을 거부하라고 요구한다.
혼란과 인내, 점진적 이해의 반복적 과정은 문학 교수들이 책 전체를 읽기 과제로 내줄 때 가르치는 것이다. 이해를 향한 이 행진은 ‘읽기’ 외엔 별다른 이름이 없다.
우리는 학생들이 독서의 어려움 속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고등교육의 교리가 된 진부한 말인 '학생들 수준에 맞춰' 접근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휘트먼이 말한 대로 해야 한다. 앞쪽 어딘가에 멈춰 서서 그들이 따라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대학의 자원은 심각하게 제약받고 있으며 연구 사명도 제약받고 있다. 많은 기관에서 학문의 자유는 위협받거나 박탈당했다. 암울한 상황이다. 대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독서의 종말'론은 자초한 결과이자 집단적 우울증의 발현으로 보인다. 소로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학생들이 계속 책을 읽게 하려면 교수진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을 끌려고 등장하는 새로운 기기나 플랫폼이 뭐든. 독서 능력 저하, 이해력 부족, 주의 산만에 대한 대응은 타협이나 양보가 아니라 해결책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인문학을 옹호하는 이유는 대체로 옳다. 책은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공감 능력을 길러준다. 시는 언어에 힘과 미묘함을 불어넣어 월리스 스티븐스가 '썩은 이름들'이라 비판했던 관용적 표현들을 새롭게 한다.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가 무료 뉴욕시립대에서 가르친 시절의 표현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내가 가르침에서 흥미를 느끼는 것은 가끔 나타나는 천재의 출현보다, 언어를 갖지 못했던 이들과, 너무나 이용당하고 학대받아 언어를 상실한 이들이 언어를 전반적으로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문학은 뛰어난 작가들을 모방함으로써 생생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윤리적 관점이나 리치의 사회 변혁 비전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책은 탈출구 혹은 여가로의 초대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문학과 인문학을 어떻게든 변호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를 잘못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모비 딕>을 읽으며 얻는 것은 멜빌의 19세기 포경에 대한 방대한 지식뿐만이 아니다. <모비 딕>을 읽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하다.
이는 전이 가능한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세상이 요구하는 일로부터 도피하는 것도 아니다. 효율을 위해 단어를 최대화하거나 정보를 최적화하는 행위도 아니다. 이는 그 자체로 근본적인 정당성을 지닌 독특한 실천이다.
지난 학기 학생들은 열정적으로 포크너의 작품(<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으로 눈을 돌렸고, 어머니의 시신을 묻기 위해 떠나는 번드런 가족의 여정을 읽는 데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이 소중하며 그중 일부를 우리 자신을 위해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