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캠프를 왔다. 이번엔 강원도 홍천의 행복공장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여러 느낌이 돋아난다. 그때마다 매번 새롭다.
이번에 올라온 느낌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이곳에 오는 것이 일종의 스캐닝 같다는 것이다.
정기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가서 단층촬영기 선반 위에 몸을 올려놓고 기계 안을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스캐너가 내 전신을 훑듯이 나 자신과 일상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의 기회로 다가온다.
스캐너의 촬영기는 내 마음의 눈이고 점검 항목은 '적정함의 감각'이다.
내 삶에 필요한 공간(꼭 물리적인 의미만은 아니다)은 어느 정도인지,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채울 필요가 있는 것인지,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하는 건 아닌지,
혼자서도 충분한지,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과의 거리 혹은 가까움은 어느 정도가 좋은지
그들과 어떻게 지내면 좋은지, 함께 무엇을 하면 좋은지
내가 일상에서 가까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내가 요즘 무엇을 멀리하고 있었던 건지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
등등을 둘러보며 살펴보고 떠올리게 된다.
숲을 뒤로 고즈넉하고 아담하게 자리 잡은 이 공간은 공동 거주 공간의 모델 같다.
자연과 사람, 혼자 지낼 곳과 함께 어울릴 곳이 공존한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갈 때 최소한의 기본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홀로 머물고, 함께 먹고 마시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같이 혹은 홀로 산책을 나가고...
이런 것이 일상에서 안정적인 기본 축을 이룰 수 있다면.
막연하게 그려보는, 우리가 살고 싶은 마을의 뼈대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여백 같은 공간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에 의해 그때그때의 사회적 내용물이 빚어진다.
서로 나누는 대화일 수도 있고, 함께 참여하는 활동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이면에는 누군가의 헌신과 수고가 있음을 생각한다.
정갈한 식사와 도시락을 장만해 주신 분들, 불멍 때 장작을 때 주던 손길,
그리고 오래 전 이 곳에 이런 식의 공간을 구상하고 애써 실행에 옮기기 위해 자기 삶의 소중한 것들을 바친 분들.
오늘 신문에서 '저널리즘Journalism'이라는 이름의 미국 경주마에 대한 에세이 한 편을 읽었다. 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해 본다.
어떤 말들은 자신을 낳은 세상과 겨루기 위해 훈련된다-재빨리 치고 나가 선두를 잡은 후 끝까지 버티는 것. 속도가 모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저널리즘)은 다른 말들처럼 무작정 달려 나가지 않는다. 차분히 자기 자리를 잡는다. 유심히 본다. 기다린다. 이 말에게 중요한 것은 순간의 번득임이 아니다. 느낌이다. 이 말이 보는 것은 우리와 다른 것 같다. 우리가 기회를 쫓을 때 이 말은 본능에 따라 달린다. 우리가 서두를 때 이 말은 트랙을 읽는다. 이 말은 여전히 진정한 강함은 인내에 있고, 진정한 힘은 움직이는 방법뿐 아니라 때를 아는 데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 말은 경주에서 출발을 가장 빨리 하거나 덩치가 가장 커서 이긴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경주를 자신의 방식으로 달린 덕분에 이긴 것이다. 그 말이 움직일 때는, 속도보다 더 강한 무엇으로 움직였다-그것은 목적이었다.
그 말은 그 뒤로 우승을 더 하진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은 이미 다른 의미에서 챔피언이 되었다. 말 애호가들은 물론 소외되거나 과소평가되거나 뒤처진 느낌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그 말이 달릴 때는 증명할 것은 없고 오직 보여줄 것뿐이다.
지금 우리 문화는 다급함에 집착한다. 하지만 승리란 늘 1위로 빠르게 달리는 걸 뜻하진 않는다. 더 깊은 보상은 경주를 이어간 끝에 자신이 되어야 할 사람이 되는 것에서 온다.
이곳에 올 때마다 여러 느낌이 돋아난다. 그때마다 매번 새롭다.
이번에 올라온 느낌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이곳에 오는 것이 일종의 스캐닝 같다는 것이다.
정기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가서 단층촬영기 선반 위에 몸을 올려놓고 기계 안을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스캐너가 내 전신을 훑듯이 나 자신과 일상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의 기회로 다가온다.
스캐너의 촬영기는 내 마음의 눈이고 점검 항목은 '적정함의 감각'이다.
내 삶에 필요한 공간(꼭 물리적인 의미만은 아니다)은 어느 정도인지,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채울 필요가 있는 것인지,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하는 건 아닌지,
혼자서도 충분한지,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과의 거리 혹은 가까움은 어느 정도가 좋은지
그들과 어떻게 지내면 좋은지, 함께 무엇을 하면 좋은지
내가 일상에서 가까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내가 요즘 무엇을 멀리하고 있었던 건지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
등등을 둘러보며 살펴보고 떠올리게 된다.
숲을 뒤로 고즈넉하고 아담하게 자리 잡은 이 공간은 공동 거주 공간의 모델 같다.
자연과 사람, 혼자 지낼 곳과 함께 어울릴 곳이 공존한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갈 때 최소한의 기본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홀로 머물고, 함께 먹고 마시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같이 혹은 홀로 산책을 나가고...
이런 것이 일상에서 안정적인 기본 축을 이룰 수 있다면.
막연하게 그려보는, 우리가 살고 싶은 마을의 뼈대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여백 같은 공간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에 의해 그때그때의 사회적 내용물이 빚어진다.
서로 나누는 대화일 수도 있고, 함께 참여하는 활동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이면에는 누군가의 헌신과 수고가 있음을 생각한다.
정갈한 식사와 도시락을 장만해 주신 분들, 불멍 때 장작을 때 주던 손길,
그리고 오래 전 이 곳에 이런 식의 공간을 구상하고 애써 실행에 옮기기 위해 자기 삶의 소중한 것들을 바친 분들.
오늘 신문에서 '저널리즘Journalism'이라는 이름의 미국 경주마에 대한 에세이 한 편을 읽었다. 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해 본다.
어떤 말들은 자신을 낳은 세상과 겨루기 위해 훈련된다-재빨리 치고 나가 선두를 잡은 후 끝까지 버티는 것. 속도가 모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저널리즘)은 다른 말들처럼 무작정 달려 나가지 않는다. 차분히 자기 자리를 잡는다. 유심히 본다. 기다린다. 이 말에게 중요한 것은 순간의 번득임이 아니다. 느낌이다. 이 말이 보는 것은 우리와 다른 것 같다. 우리가 기회를 쫓을 때 이 말은 본능에 따라 달린다. 우리가 서두를 때 이 말은 트랙을 읽는다. 이 말은 여전히 진정한 강함은 인내에 있고, 진정한 힘은 움직이는 방법뿐 아니라 때를 아는 데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 말은 경주에서 출발을 가장 빨리 하거나 덩치가 가장 커서 이긴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경주를 자신의 방식으로 달린 덕분에 이긴 것이다. 그 말이 움직일 때는, 속도보다 더 강한 무엇으로 움직였다-그것은 목적이었다.
그 말은 그 뒤로 우승을 더 하진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은 이미 다른 의미에서 챔피언이 되었다. 말 애호가들은 물론 소외되거나 과소평가되거나 뒤처진 느낌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그 말이 달릴 때는 증명할 것은 없고 오직 보여줄 것뿐이다.
지금 우리 문화는 다급함에 집착한다. 하지만 승리란 늘 1위로 빠르게 달리는 걸 뜻하진 않는다. 더 깊은 보상은 경주를 이어간 끝에 자신이 되어야 할 사람이 되는 것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