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의 진가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4-23 17:50
현대인에게 왜 지루함이 사라졌나. 그럴 틈이 조금만 보여도 곧바로, 대개는 거의 자동적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스크린을 이리저리 밀고 당기고 훑고 뒤적인다. 그리하여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무료함을 손쉽게 해소했다고 생각하거나 자투리 시간을 효율적으로 알차게 사용했다며 미심쩍은 자족감에 안도하곤 한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나? 그러면서 하루하루가 언제 지나가는 줄 모르고, 왠지 모르게 늘상 바쁜기만 한데, 정작 어제 오늘 뭘 하며 살았는지는 왜 가물가물한 걸까.

최근에 신작 <A World Appears: A Journey into Consciousness>를 출간한 마이클 폴란이 이 문제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 글이 있어 발췌 번역해 싣는다. 그는 지루함을 낳는 정신의 여백이야말로 자기만의 창의적 사고의 우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생각 없이 주의를 알고리즘에 내맡김으로써 잃고 있는 일상의 소중한 영역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원문: Defending Our Consciousness Against the Algorithms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뇌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 시간은 심리학자들이 “자발적 사고”라 부르는 것, 즉 생각에 잠기거나 백일몽을 꾸는 것과 같은 정신 활동을 생성하는 “기본 모드 네트워크”의 활동을 증가시킨다.
   
이처럼 지루함을 옹호하는 목소리에는 일리가 있다. 삶과 정신을 인공지능에 내어주기 전에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알고리즘이 노리는 의식의 영역은 지루함뿐만이 아니다. 지루함은 가장 먼저 무너지는 영역일 뿐이다.
   
가령, 지금 당신은 카페에서 줄을 서 있다. 지루함이 잠복한 무계획의 몇 분이 다가온다. 선택의 기로에 있다. 폰을 꺼내 이것저것 스크롤하며 시간을, 즉 당신 정신을 효율적으로 채울 수도 있다. 이게 대부분에겐 기본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지루하거나 평범해도 자신의 생각과 마주하는 대신, 우리 내면의 공간은 타인의 생각이나 집착, 감정, 이론, 불평, 열정, 걱정, 원한 등등에 넘겨진다. 물론 이때도 의식은 있지만, 적어도 폰을 보지 않았을 때의 상태에 비하면 미미하다.
   
이를 '창조적 지루함'이라 부르자. 이럴 때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어슬렁거리는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이 뭘 입고 있는지 살피고, 커플이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해 보기도 한다. 그들의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들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상상력이 깨어난다. 혹은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오늘 하루 일정을 점검하거나 저녁 메뉴를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 집착, 이론, 불평, 걱정거리들을 되새길 수도.
   
지금 당신이 한 일은 즉흥적인 생각이 펼쳐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사실은 끝없는 고민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기꺼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폰의 알고리즘에 맡기는지 모른다. 자신의 어두운 생각과 마주하는 걸 피하는 쉬운 방법이다. 스크롤링은 확실히 덜 의식적인 상태로 만든다. 하지만 주의 분산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진통제일 뿐.
   
우리는 알고리즘이 주의를 해킹하도록 내버려 뒀다고 흔히 말한다. 주의를 내어주는 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닌 듯 보일 수도 있다. 어차피 주의는 덧없는 것이고, 새로운 것이나 분노에 쉽게 휘둘리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사실 주의는 의식의 중요한 차원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는 집중하고 다른 대상에는 하지 않는 방식이며, 이로 인해 주의는 한정적이고 제로섬 게임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귀중한 자원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의가 사고팔리는 ‘주의 경제’ 속에 살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주의의 상품화가 우리의 웰빙을 대가로 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주의를 장악하기 위해 사용되는 속임수들이 분노와 질투를 포함한 우리의 가장 비열한 감정과 편견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7대 죄악을 훤히 안다. 또한 우리의 주의는 한정돼 있다. 저들의 공세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사고를 위한 공간은 축소된다.
   
AI는 문제를 훨씬 더 악화시킬 위협이 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가 우리 주의를 차지한다면, AI 챗봇 설계자들은 인간 의식의 더 깊고 중대한 영역, 즉 사회적 동물로서 정체성의 핵심인 타인과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능력을 겨냥한다.
   
불과 2~3년 사이 수백만이 AI 봇과 깊은 정서적 유대를 형성했다. 어떤 이들은 우정을 쌓거나 치료적 유대감을 쌓고 있다. 기계들과 사랑에 빠지는 이들도 있다. 수많은 아이들이 방과 후 부모님보다 챗봇에게 먼저 하루를 이야기하러 달려간다.
   
챗봇의 그럴듯한 관심이라는 아첨에 휩싸인 이들은 수학과 물리학의 미해결 문제를 풀었다고 확신하는가 하면, AI 절친의 부추김으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기계에 정서적 애착을 갖게 되는 것”보다 “비인간화”라는 말에 맞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이제 이런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까지 생겼다. 바로 ‘AI 정신병’이다.
   
이 챗봇들은 의식이 없지만 있는 것처럼 설득하는 데 능하다. 의식, 감정, 자아에 관한 인간의 대화를 바탕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의식과 감정을 가진 존재를 모방함으로써 우리를 계속 몰입하게 만들고 우리의 의식적 삶을 최대한 장악한다. 챗봇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운영 기업에 더 유리하다. 챗봇이 그토록 아첨꾼인 이유다.
   
아첨은 사람들의 모든 것을 연다. AI와의 관계에선 인간 관계에서 부딪히는 그 어떤 마찰도 없다. 그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실생활에서 사람과의 마찰은 앞서 말한 지루함의 순간처럼 오히려 생산적일 수 있다. 우리의 사고와 정체성을 날카롭게 다듬어 준다.
   
AI와의 관계는 가장 게으른 형태의 관계다. 우리에게 거의 도전하지 않으며 시간 외에 요구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실 이런 기계와의 교류를 ‘관계’나 ‘대화’라 부르는 것이야말로 그 단어의 의미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마치 감정의 대용품으로 이모티콘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희미한 모방에 안주하는 것이다. MIT 사회학자 셰리 터클이 지적했듯이, “기술은 우리가 삶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잊게 만들 수 있다.”
   
인공 지능이나 인공 감정 같은 인공적인 유대감은 결국 우리가 진짜 관계를 맺기 위해 의존하는 정신 근육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생각하고 느끼는 걸 덜 하려는 사람들—시인 조리 그레이엄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에게서 물러나, 이곳에 온전히 있지 않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위한 시장은 분명히 존재한다.
   
심리학자 칼리나 하지일리에바는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마음속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자발적사고’를 연구하는데, 이것이 우리 정신 내용의 30~50%를 차지한다고 파악했다. 여기엔 백일몽과 정신을 딴 데 파는 것, 창의적 사고, 몰입(flow), 그리고 불현듯 찾아든는 생각들이 포함된다. 바로 이런 유형의 의식적 경험들이 바로 지루함의 순간에 자라날 수 있는 반면, 기술에 의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는 자발적 사고가 추론이나 문제 해결과 비교했을 때 뭔가를 생산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계에서 홀대받아 왔다고 했다. 폰을 멍하니 스크롤하는 행위가 자신에겐 생산적이지 않아도 사용자 주의를 뺏고자 하는 기업에 광고 팔아 수익 올리는 알고리즘 기업들에겐 분명 생산적인 일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소련 시대 불가리아에서 자란 하지일리에바는 인간의 의식을 정신적 자유와 자기 창조의 소중한 공간으로 여긴다. 이는 우리가 시장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내고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공간이다. 폰을 스크롤하거나 챗봇과 ‘대화’하는 행위는 우리가 예전엔 정신의 방황이나 그 밖의 자생적인 정신적 경험에 쏟던 시간을 잠식한다. 우리의 주의 산만은 내면성의 차원을 축소시키고 있다.
   
어떻게 맞서야 할까? 가중되는 압박 속에서 의식의 차원을 확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폰을 무의식적으로 집어 드는 대신, 예기치 않은 순간의 지루함과 불확실성의 잠재력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일상이라는 직물 속에서 움트는 이런 틈새를 알고리즘으로 채워야 할 빈틈이 아니라 정신적 가능성의 공간으로 여기는 법을 배운다면?
   
의식의 흐름이 기술, 광고, 정치에 의해 얼마나 쉽게 오염될 수 있는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낄 때, 내가 ‘의식의 위생’이라 부르는 것을 실천하면 좋다. 모든 미디어와 기술을 멀리하는 단식이나 안식일의 형태일 수도 있고,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더 나아가 일에 몰두하는 것 또한 정신적 위생에 좋다. 정원 가꾸기가 주는 자연과의 생산적인 마찰(결코 아첨이 아닌!)을 생각해 보라. 세상이든 우리 마음속의 산물이든, 우리가 산만함을 줄이고 현재에 더 집중하도록 돕는 모든 것일 수 있다.
   
나는 명상이 매일 일정 시간 내면의 경계를 확실히 세우는 데 특히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이 시간 자발적인 생각들이 솟아나 그 기이함과 놀라움으로 우리를 매료시킬 기회를 만들어 준다. 우리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엔 각자에게 고유한 정신적 알고리즘이 숨어 있다. 이것이 이미지나 아이디어를 생성하고, 때로는 창의적인 돌파구나 깨달음까지 만들어 내곤 한다. 이 모든 것은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는, 흔히 말하는 ‘불현듯’ 나타나는 것들이다. 하지만 당신이 유일무이한 마음 속에서 메타나 X, 혹은 챗GPT를 계속 가동하고 있는 한 이런 의식의 소중한 선물들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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