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끌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니 자동문이 기다렸다는 듯 저절로 열린다.
'어라?' 출입문의 자석식 보안 카드를 대기도 전이었다.
"됐다!"
하고서 뒤통수를 보이며 개구지게 달아나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가는 아이. 6층에 사는 꼬마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는 아까부터인 듯, 아이의 엄마가 서 있다. 아마도 모자가 승강기를 기다리던 중에, 내가 오는 걸 아이가 발견하고서 뛰어와 자동문이 열리게 한 모양이다.
"어유, 착하네."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서 있는 소년에게 칭찬의 말을 선생님 말투로 해주었다. 짐짓 눈을 딴 데로 향하고 있던 아이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더니 가지런한 치아를 보이며 "히-" 한다. 옆에 서 있는 어머니도 대견한 듯 아까부터 미소를 짓고 있다.
셋이 승강기에 오르고 문이 닫힌 후에도 굳이 말을 걸었다.
"어쩜 그렇게 착해? 원래 그렇게 다른 사람들 잘 도와주니?"
볼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이가 "예"하며 고개까지 두 번을 끄덕인다.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참말이다.
그래, 나도 기억한다. 몇 년 전 코흘리개 시절에도 아이는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꼭 배꼽인사를 하며 "안녕하세요" 했다. 언젠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훌쩍훌쩍 흐느끼며 승강기에 올랐는데도, 나를 보고서는 평소 하던 인사를 그대로 차려서 하고는 다시 훌쩍 모드로 돌아가, 속으로 웃음이 나면서도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제 몇 학년이야?"
"4학년요."
"벌써 그렇게 컸구나. 맞아, 너 어릴 때부터 인사를 잘했어."
어릴 때 이야기를 하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처럼 부끄러운 걸까. 조금 전 어엿하던 소년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쑥스러워 하며 옆에 있는 엄마를 쳐다보며 숨듯이 곁으로 다가간다. 그런 아이를 엄마는 표 나지 않게 감싸준다. 그러고서 내 눈을 다시 한 번 힐끗 쳐다보는 아이에게 나는 기분 좋은 미소밖에 줄 게 없다.
어느새 아이가 내릴 층인지, 손을 모으고 머리를 꾸벅 하며 "안녕히 가세요-" 한다. 예전 그 어조 그대로다. 아까 저에 대해 한 이야기가 하나도 틀리는 말이 없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
"그래, 잘 가-"
왠지 모를 아쉬움에 한마디를 더 보탠다.
"저녁 맛있게 먹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네-"하는 소리가 답장처럼 날아든다.
저맘때는 다 그런가. 나도 그랬던가. 다른 사람은 어땠을까. 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요즘 세대'라고 다 요즘 세대 같지도 않다. '예전 세대'라고 해서 다 같지도 않은 것처럼. 그런 것쯤은 이제 하도 많이 겪어서 안다.
엘리베이터 주변의 작은 공간도 사회다. 그곳 문화를 보면 그 사회를 알 수 있다. 혹시 뒤에 누가 탈 사람이 오는지 살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승강기 문이 열리기 바쁘게 누가 올 새라 얼른 오르고 닫힘 버튼을 누르는 사람도 있다. 내 경험으로는 요즘 후자를 많이 보는 것 같다. 전자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오늘 아이는 예상치도 못하게 엘리베이터에서 현관문까지 와서 문을 열어줬다. 어른들에게서는 거의 절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본래 우리는 누구나 맘 속 깊이 (어떤 이에겐 다른 뭔가에 눌려 묻혀 있을 정도로 깊이) 그런 선의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메리 미즐리가 <짐승과 인간>에서 말하듯, 감정을 지닌 동물도 대개는 그렇다. 호의가 선의로 바뀌는 것은 대개 위협을 받거나 불안을 느낄 때다. 동물학자나 아동학자들 말이거니와, 내 경험으로도 그런 것 같다.
사람도 그렇다. 경쟁에 쫓기거나 그로 인한 불안이 몸에 밴 결과 우리는 어릴 때 자연스러웠던 호의와 선의와 친절을 잃는다. (그런 것 없이도 악의를 보이는 인간의 특별한 잠재적 면모을 ‘사악함wickedness’이라고 미즐리는 불렀다. 이기심과도 다르다.)
기꺼이 도와주려 하고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던 어린 시절의 그 마음은 자라면서 어느 순간 배신과 배반, 환멸과 냉소를 겪으며 꺾이고 상처 입기 시작한다. 그로 인한 크고 작은 아픔(과 분노)들을 나 역시 수도 없이 기억한다.
오호라, 세상은 알고 보니 그런 게 아니었구나. 어느 순간 그렇게 단정 짓고, 그전까지 나의 호의와 선량함과 친절은 '물정 모르는 순진함'이었음 '깨닫는' 날을 맞게 된다. 그 다음부터 서서히 정글의 법칙과 야수의 생존과 경쟁의 논리로 마음을 재설정(무장)한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어른이 된다'고 여긴다. 그런 어른 게임에서 '성공'하고 '승리'한 이들을 곳곳에서 본다. 아름다운가. 그게 다일까. 정말 그럴 수밖에 없을까.
그게 전부라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그보다 얼마나 시시할까)
세상에는 선의의 불씨를 경험과 지혜로 키워가는 이들도 있음을 나는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삶에서 무엇을 조건으로 보고, 무엇을 목표로 삼고 지향하고 노력해야 할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럴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의 길로 이끈 그 아이의 작지만 커다란 선의에 또 감사한다.
'어라?' 출입문의 자석식 보안 카드를 대기도 전이었다.
"됐다!"
하고서 뒤통수를 보이며 개구지게 달아나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가는 아이. 6층에 사는 꼬마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는 아까부터인 듯, 아이의 엄마가 서 있다. 아마도 모자가 승강기를 기다리던 중에, 내가 오는 걸 아이가 발견하고서 뛰어와 자동문이 열리게 한 모양이다.
"어유, 착하네."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서 있는 소년에게 칭찬의 말을 선생님 말투로 해주었다. 짐짓 눈을 딴 데로 향하고 있던 아이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더니 가지런한 치아를 보이며 "히-" 한다. 옆에 서 있는 어머니도 대견한 듯 아까부터 미소를 짓고 있다.
셋이 승강기에 오르고 문이 닫힌 후에도 굳이 말을 걸었다.
"어쩜 그렇게 착해? 원래 그렇게 다른 사람들 잘 도와주니?"
볼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이가 "예"하며 고개까지 두 번을 끄덕인다.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참말이다.
그래, 나도 기억한다. 몇 년 전 코흘리개 시절에도 아이는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꼭 배꼽인사를 하며 "안녕하세요" 했다. 언젠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훌쩍훌쩍 흐느끼며 승강기에 올랐는데도, 나를 보고서는 평소 하던 인사를 그대로 차려서 하고는 다시 훌쩍 모드로 돌아가, 속으로 웃음이 나면서도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제 몇 학년이야?"
"4학년요."
"벌써 그렇게 컸구나. 맞아, 너 어릴 때부터 인사를 잘했어."
어릴 때 이야기를 하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처럼 부끄러운 걸까. 조금 전 어엿하던 소년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쑥스러워 하며 옆에 있는 엄마를 쳐다보며 숨듯이 곁으로 다가간다. 그런 아이를 엄마는 표 나지 않게 감싸준다. 그러고서 내 눈을 다시 한 번 힐끗 쳐다보는 아이에게 나는 기분 좋은 미소밖에 줄 게 없다.
어느새 아이가 내릴 층인지, 손을 모으고 머리를 꾸벅 하며 "안녕히 가세요-" 한다. 예전 그 어조 그대로다. 아까 저에 대해 한 이야기가 하나도 틀리는 말이 없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
"그래, 잘 가-"
왠지 모를 아쉬움에 한마디를 더 보탠다.
"저녁 맛있게 먹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네-"하는 소리가 답장처럼 날아든다.
저맘때는 다 그런가. 나도 그랬던가. 다른 사람은 어땠을까. 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요즘 세대'라고 다 요즘 세대 같지도 않다. '예전 세대'라고 해서 다 같지도 않은 것처럼. 그런 것쯤은 이제 하도 많이 겪어서 안다.
엘리베이터 주변의 작은 공간도 사회다. 그곳 문화를 보면 그 사회를 알 수 있다. 혹시 뒤에 누가 탈 사람이 오는지 살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승강기 문이 열리기 바쁘게 누가 올 새라 얼른 오르고 닫힘 버튼을 누르는 사람도 있다. 내 경험으로는 요즘 후자를 많이 보는 것 같다. 전자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오늘 아이는 예상치도 못하게 엘리베이터에서 현관문까지 와서 문을 열어줬다. 어른들에게서는 거의 절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본래 우리는 누구나 맘 속 깊이 (어떤 이에겐 다른 뭔가에 눌려 묻혀 있을 정도로 깊이) 그런 선의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메리 미즐리가 <짐승과 인간>에서 말하듯, 감정을 지닌 동물도 대개는 그렇다. 호의가 선의로 바뀌는 것은 대개 위협을 받거나 불안을 느낄 때다. 동물학자나 아동학자들 말이거니와, 내 경험으로도 그런 것 같다.
사람도 그렇다. 경쟁에 쫓기거나 그로 인한 불안이 몸에 밴 결과 우리는 어릴 때 자연스러웠던 호의와 선의와 친절을 잃는다. (그런 것 없이도 악의를 보이는 인간의 특별한 잠재적 면모을 ‘사악함wickedness’이라고 미즐리는 불렀다. 이기심과도 다르다.)
기꺼이 도와주려 하고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던 어린 시절의 그 마음은 자라면서 어느 순간 배신과 배반, 환멸과 냉소를 겪으며 꺾이고 상처 입기 시작한다. 그로 인한 크고 작은 아픔(과 분노)들을 나 역시 수도 없이 기억한다.
오호라, 세상은 알고 보니 그런 게 아니었구나. 어느 순간 그렇게 단정 짓고, 그전까지 나의 호의와 선량함과 친절은 '물정 모르는 순진함'이었음 '깨닫는' 날을 맞게 된다. 그 다음부터 서서히 정글의 법칙과 야수의 생존과 경쟁의 논리로 마음을 재설정(무장)한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어른이 된다'고 여긴다. 그런 어른 게임에서 '성공'하고 '승리'한 이들을 곳곳에서 본다. 아름다운가. 그게 다일까. 정말 그럴 수밖에 없을까.
그게 전부라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그보다 얼마나 시시할까)
세상에는 선의의 불씨를 경험과 지혜로 키워가는 이들도 있음을 나는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삶에서 무엇을 조건으로 보고, 무엇을 목표로 삼고 지향하고 노력해야 할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럴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의 길로 이끈 그 아이의 작지만 커다란 선의에 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