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라는 제목의 시집이 있다.
체력 단련장에서 습관처럼 반복하는 동작 중에 바퀴 돌리기가 있다. 오늘 아침 문득 그 시집이 떠오르며 돌아오는 내내 바퀴에 생각이 머물렀다.
바퀴는 신기한 발명품이다. 굴드는 이걸 두고 자연적 진화와 기술적 진화의 차이를 설명했고, 불교에선 부처의 가르침과 윤회를 바퀴에 비유하고, 인류학자들은 유라시아 대륙에선 일찌감치 사용됐던 바퀴가 왜 남미에선 사용되지 않았는지를 두고 설왕설래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의 바퀴는 일상의 순환과 전진을 함께 말하는 구조적 상징처럼 다가온다.
(굴러간다는 것. 그냥 한바퀴를 돌 뿐인데 앞으로 이동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재미있는 현상 아닌가. 그걸 유심히 관찰해 무거운 걸 옮기기 위한 발판으로 응용한 것은 대단한 발명이 아닐 수 없다.)
둥근 바퀴가 뱅글뱅글 회전하면서도 어떤 선을 그리며 이동하듯 우리는 하루의 일과를 반복하면서도 어디론가 나아간다. 그게 아니면.
하루하루 반복해서 똑같이 회전은 되풀이하되 나아가지는 못할 땐? 공회전이라 부르기도 하고 쳇바퀴 같다고도 한다. 그게 뭐 어떠냐고 반문하며 자족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회전을 하면서도 어디론가 이끌리고 그곳을 향해 나아갈 때 행복감을 느낀다.
마치 지구가 자전을 반복하면서도 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공전하듯.
바퀴가 굴러가기 위해선 반복되는 일상의 순환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하루하루 회전을 반복하면서도 바퀴 면이 바닥에 잘 닿아 있는지, 구르는 바퀴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야 한다.
체력 단련장에서 습관처럼 반복하는 동작 중에 바퀴 돌리기가 있다. 오늘 아침 문득 그 시집이 떠오르며 돌아오는 내내 바퀴에 생각이 머물렀다.
바퀴는 신기한 발명품이다. 굴드는 이걸 두고 자연적 진화와 기술적 진화의 차이를 설명했고, 불교에선 부처의 가르침과 윤회를 바퀴에 비유하고, 인류학자들은 유라시아 대륙에선 일찌감치 사용됐던 바퀴가 왜 남미에선 사용되지 않았는지를 두고 설왕설래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의 바퀴는 일상의 순환과 전진을 함께 말하는 구조적 상징처럼 다가온다.
(굴러간다는 것. 그냥 한바퀴를 돌 뿐인데 앞으로 이동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재미있는 현상 아닌가. 그걸 유심히 관찰해 무거운 걸 옮기기 위한 발판으로 응용한 것은 대단한 발명이 아닐 수 없다.)
둥근 바퀴가 뱅글뱅글 회전하면서도 어떤 선을 그리며 이동하듯 우리는 하루의 일과를 반복하면서도 어디론가 나아간다. 그게 아니면.
하루하루 반복해서 똑같이 회전은 되풀이하되 나아가지는 못할 땐? 공회전이라 부르기도 하고 쳇바퀴 같다고도 한다. 그게 뭐 어떠냐고 반문하며 자족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회전을 하면서도 어디론가 이끌리고 그곳을 향해 나아갈 때 행복감을 느낀다.
마치 지구가 자전을 반복하면서도 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공전하듯.
바퀴가 굴러가기 위해선 반복되는 일상의 순환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하루하루 회전을 반복하면서도 바퀴 면이 바닥에 잘 닿아 있는지, 구르는 바퀴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