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도구적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3-01 22:02
스티븐 킹의 '척의 일생'(영화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난 후에 읽게 된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의 글. 둘의 메시지가 상통한다. 도구적 사고에 젖어 있는 한국 사회에도 반드시 필요한 메시지다. 길지만 천천히 끝까지 읽고 음미해 봤으면 한다.

원문: The six-second hug

예술에서부터 종교, 성에 이르기까지 도구화는 본질적 가치를 고갈시킨다. 하지만 삶은 물질적 이익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윤이나 자기 홍보, 선전  같은 다른 목적을 위한 예술은 진정한 예술이라 할 수 없다. 적어도 순수한 의미의 예술은 아니다. 그래서 최근 영국 전역의 갤러리와 박물관이 무료 또는 할인 입장권을 제공하는 ‘내셔널 아트 패스’ 광고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더 많이 보라. 더 많이 살아라'. 맞는 말 같다. 예술은 확실히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광고에서 '더 많이'는 순전히 양적인 의미지 질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예술로 삶에 몇 년을 더하세요'라는 주 슬로건에 이어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면 더 오래 살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예술을 둘러싼 이런 메시지는 이제 흔해졌다. 영국 예술 위원회는 '창의적·문화적 활동 참여가 개인과 공동체에 건강상 이점이 있음이 입증되었다'고 홍보한다. 이 포스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모든 것이 도구화되는 현상을 속으로 한탄해왔다: 더 이상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은 없고 오직 실용적 기능에 유용한 것으로만 여겨지는 현실 말이다.
   
이 안타까운 추세를 처음 접한 건 2010년 그레첸 루빈의 책 <행복 프로젝트>(2009)를 리뷰해야 했던 불운한 때였다. 그 책은 행복을 쉼 없이 추구한 한 해의 기록이었다. 한 구절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와 지금도 거의 단어 하나하나를 기억할 수 있다.
   
남편과 함께한 하루가 찜찜하게 시작되었지만 저자는 사과를 한 뒤 이렇게 썼다: “우리는 포옹했다. 적어도 6초 동안. 연구를 통해 알게 된 바로는, 유대감을 촉진하는 기분 전환 화학물질인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의 분비를 촉진하는 데 필요한 최소 시간이다. 긴장된 순간은 지나갔다.”
   
사랑이나 애정 때문만이 아니라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고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남편을 껴안는 여성의 소름 끼치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았다. 그 문장들은 그녀의 행복 프로젝트가 기분 개선만을 염두에 두고 모든 행동을 하게 만든 걸로 부각시켰다. 진실조차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행복 생산 기계로 여긴 1년간의 실험을 마친 그녀는 무엇이 변했고 변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아마도 내가 보고 싶었던 것만 본 걸지도 몰라' 그녀는 의문을 품었지만 곧바로 덧붙인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진실이든 아니든 기분만 좋아지면 그걸로 충분하다.
   
행복을 위한 포옹과 장수를 위한 창의성을 목격한 그 사이 몇 년 동안, 나는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이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져다주는 물질적 이익을 위해 홍보되는 수많은 다른 사례들을 보아왔다. 이러한 도구화는 너무나 당연시되어 이제는 이상하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고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영향으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놓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진단을 제시하기 전에, 모든 것이 도구화되고 있다는 과장된 듯한 주장을 변호할 필요가 있겠다.
   
이제는 진정으로 어떤 가치 있는 것이라도 적어도 일부 사람들이 그 본질적 장점을 언급하기 전에 실용적 이점을 옹호하지 않은 사례를 떠올리기 어렵다. 데보라 젠킨스 같은 기독교인들조차 연구를 인용하며 이런 말을 하는 걸 심심찮게 듣는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수명을 연장하고 우울증을 줄이며 긍정적인 정신 건강을 촉진할 수 있다.
   
오페라 노스 웹사이트는 노래 부르는 것의 10가지 이점을 나열하는데, 그중 예술이나 창의성과 관련 있는 건 단 하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머지는 ‘기분을 좋게 한다’, ‘폐 기능을 향상시킨다’, ‘스트레스를 이기고 이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삶이 힘들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자신감을 높인다’ 등이다.
   
우리는 점점 더 어떤 활동이 좋은지 묻기보다 그 활동이 우리에게 어떤 이점을 줄 수 있는지 묻는다.
   
자연과의 재연결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도 실용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쾌락주의에 호소하도록 고안된 이유들로 그렇게 한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자연 속 걷기가 웰빙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며, '삼림욕'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숲을 마치 걸어 들어가는 진료소처럼 이용하도록 부추긴다.
   
이런 논리의 자연 예찬론자들은 우리가 숲으로 가는 이유가 나무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 때문이라면, 벌목자들과 똑같은 착취적이고 추출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아이러니를 놓치고 있다.
   
심지어 철학, 즉 이기적 목적이 없는 지혜의 추구마저 도구화의 저주에 빠졌다. 대학들은 이제 자신들의 프로그램이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탐구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훨씬 더 실질적이어야 한다: 철학이 집을 사거나 연금을 마련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
   
철학은 흔히 '전환 가능한 사고 능력'을 기르는 훈련으로 판매된다. 이런 능력이 가장 쓸모 있는 곳은 분명하다: 직장 세계다. 케임브리지 대학 철학부는 홈페이지에 이력서에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 기술-지적 능력, 의사소통 능력, 조직 능력, 대인관계 능력, 연구 능력-을 가르친다는 내용을 올려 놓았다.
   
도구화의 논리는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행하는 일에 적용될 때 가장 해롭다. 칸트는 ‘자신의 인격이든 타인의 인격이든 인간성을 항상 목적으로 대하고 단순히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 것을 정언적 명령-도덕의 절대적 요구로 봤다.
   
타인을 도구화하는 단어들은 그 행위가 얼마나 타락한 것인지 반영한다: 비인간화, 객체화, 착취. 그 때문에 사회적 유대 관계를 도구화하는 것은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자멸적이다. 사회적 관계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이득만을 부각시키기 시작하면, 우리는 관계 속 다른 사람들을 자기 발전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하게 된다.
   
일상적으로 도구화된 활동 목록은 끝이 없다. 정원 가꾸기, 스포츠, 캠핑, 수영, 캠페인 활동, 지역사회 봉사, 빵 굽기, 공예, 일기 쓰기, 웃음, 심지어 감사의 말까지 추가할 수 있다. 우리는 점점 그 자체의 가치보다 우리에게 어떤 이득을 주는지 묻는다. 여기서 '이득'이란 건강, 부, 세속적 성공을 의미한다.
   
자연, 예술, 배움, 우정 등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도구적 이점을 부각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길 수 있지만, 그게 무슨 해가 있나? 결국 도구화된 삶을 사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반론은 좋은 삶이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같은 전시회를 가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내면의 동기가 다르다면 그들이 사는 세계도 다르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무엇이 가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다른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을 위해 행한다고 봤다. 후자만이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 반면, 수단적 행위는 의존적 가치만 가진다.
   
삶의 궁극적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 것들에 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순수하게 도구적인 것들에 의해 진정한 가치로부터 우리는 쉽게 멀어지기 때문에 매 시대, 모든 삶의 단계에 걸쳐 반복할 가치가 있다.
   
돈은 가장 명백한 사례다. 돈은 그것이 살 수 있는 것들 때문에 중요하며,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많은 것들을 얻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결코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는 탓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이나 소중한 활동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본질적 가치보다 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흔한 실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수단화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자체로 좋은 것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할 뿐 아니라, 바로 좋은 것들로부터 본질적 가치를 박탈하고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게다가 그 수단이 되는 것들조차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도구화가 추구하는 것들-건강, 부, 심리적 안녕을 생각해보라. 이 모든 것은 너무나 당연히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나머지,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부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육체적 건강에 대해서도 똑같이 진실이다.
   
육체적 건강을 우리는 흔히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이야기한다. 그러나 건강 그 자체가 소중한 건 아니다.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건강을 중시한다. 하나는 건강하지 않으면 고통과 괴로움을 수반하고,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쁘므로 피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건강할 때 우리 삶에서 의미 일들을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의미 있는 활동, 경험이 결여된 건강한 삶은 공허하다.
   
실제로 만성 질환이 있는 많은 사람들도 자신이나 타인을 놀라게 하며 결국 건강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건강하지만 미움받는 것보다 병들었지만 사랑받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발견한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한 연구 참여자가 말한 것처럼: “육체적 능력이 없어도 나는 삶을 최대한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내면에서 비롯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신체적 건강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더 쉽게 감상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질병 속의 건강’도 가능하며, 가장 넓은 의미의 건강은 질병의 부재가 아니다.
   
심지어 정신 건강조차 그 자체로 중요한 건 아니다. 정신 질환이 본질적으로 나쁜 것은 이득 없이 고통만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 건강이 양호한 상태는 신체 건강이 양호한 상태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더 가치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심지어 어떤 정신적 고통도 본질적으로 나쁜 건 아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우리의 감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도구화의 가장 흔한 이점으로 주장되는 행복조차도 본질적인 선은 아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 현실 세계와 유리된 채 만족감에 취해 행복의 화학 구름 속에 사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 파트너가 바람을 피우는데도 환상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 고통스러운 진실보다 행복한 무지가 때로는 낫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선한 것은 아니다.
   
건강, 부, 정신적 안녕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 선한 것은 무엇인가? 철학자들은 반복적으로 하나의 무엇을 인류의 '궁극적 선'으로 규정하려는 실수를 저질러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지적 관조였으며, 불교도에게는 고통의 소멸이었고, 칸트에게는 선한 의지였으며, 공리주의자들에게는 행복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하나의 상태나 활동으로 한정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번영(자기발전)을 인류의 최고선으로 규정했을 때 더 정확했으며, 번영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규정적일 때만 오류를 범했다.
   
우리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들에 몰입하는 삶을 살 때 번영한다. 번영은 인간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니체는 음악 없는 삶은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음악에 무감각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삶의 궁극적 가치가 내재적 가치를 지닌 것들로부터 온다는 생각은 다원주의적 관점이다. 내재적 인간적 선은 추가적인 정당화 없이도 삶을 살 가치가 있게 만드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들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묻는다면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핵심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가치 있는 이유를 논증할 수 없다. 단지 그것들이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를 설명하고 타인이 그 가치를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 가령, 숲에서 보낸 하루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경이로움을 깨닫게 하고 자연 세계에 감탄하게 하므로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스포츠를 하거나 관람하는 것은 삶의 다른 순간보다 더 매끄럽게 마음과 몸을 하나로 모으려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에 참여하거나 목격하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다른 문화로의 관문으로, 그 문화의 구성원과 소통하고 그 문학과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경험을 넓혀준다. 이것이 수명을 단 1초라도 늘리거나 치매를 하루라도 늦추지 못한다 해도 가치 있다.
   
이것들을 미래를 위해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힘을 키우는 수단으로 본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가치 있는 것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인생은 미래를 위한 훈련이 아니다. 이미 시작된 게임이며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의 구분은 개념적으로는 명확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금방 모호해진다. 가장 명백하게, 많은 것들은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를 동시에 지닐 수 있다. 내가 잘못 도구화되었다고 주장한 모든 것들이 그렇다. 도구화는 별개의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단지 내재적 가치 위에다 그것을 올려놓을 뿐이다.
   
또한 내재적 가치가 항상 외재적 가치를 압도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실용적 필요를 지니며, 소설을 읽거나 손주와 놀기보다 돈을 벌거나 나무를 패거나 사냥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많은 일은 도구적 목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오로지 내재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삶은 특별한 특권이자 사치, 혹은 그 양자 모두에 해당할 것이다.
   
게다가 모든 외재적 가치가 동등하게 창조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궁극적 가치에 더 가깝게 기여한다. 진정한 가치에 쓸 돈을 벌기 위해 상사에게 아첨하며 호의를 얻는 행위는 우리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서 멀어지게 할 뿐,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다. 
   
반면 윤리학 공부는 어떤 의미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지만, 그 목적이 너무 가까워 거의 그 자체로 선한 것으로 간주될 정도다. 이 때문에 ‘예술을 위한 예술’ 대 ‘교훈적 도구로서의 예술’ 논쟁은 다소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예술, 특히 기악과 추상 회화는 그 자체만을 위해 감상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많은 문학, 영화, 연극은 윤리, 정치, 인간 심성에 대한 통찰을 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이해는 우리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며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는다. 이런 예술은 도덕 교육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지만, 훌륭한 예술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 구분이 인위적으로 보인다.
   
예컨대, 체호프가 왜 위대한 극작가였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도 그의 무대 기술과 그것이 표현하는 인간성을 분리할 수 없다. 많은 교훈적 예술의 문제는 교훈을 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교훈이 너무 조잡하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이런 작품들은 단순히 나쁜 예술일 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교육 도구이기도 하다.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의 관계는 복잡하며, 도구화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이를 평평하게 단순화하려는 시도다. 도구화는 가장 유용한 것을 식별한 뒤 궁극적 가치로부터 분리하고 우선순위를 부여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는 과정에서 오히려 극대화하겠다고 약속한 이점 자체를 축소하거나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유대를 예로 들어보자.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독서 같은 어떤 활동도 혼자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할 때 더 유익하다고 한다. 이 메시지는 이제 널리 알려지고 이해되어, 사람들은 친교가 정신적·신체적 건강에 중요함을 안다.
   
그러나 우정과 공동체의 가장 가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우리를 자기중심적 관심에서 벗어나 타인의 필요를 더 의식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교 활동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서로를 아끼고,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집단적 경험이나 노력의 일부가 되는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함께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개인의 웰빙만을 위해 어울리기로 선택한다면, 사교 활동이 일반적으로 가져다주는 혜택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도구화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실용적인 것들을 직접 추구하도록 장려하기 때문에 효율성의 환상을 띤다. 그러나 종종 이는 역효과를 낳는다. 주된 동기가 그로 인한 이익을 얻는 것이 된다면, 대부분의 경우 활동이 주장하는 혜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지름길shortcut처럼 보이는 것들은 결국 단락short-circuit현상으로 드러나고 달성하려는 목표를 오히려 훼손한다.
   
도구화가 이토록 중대한 오류라면 그 원인은 뭘까? 결국 우리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활동에서 의도적으로 의미를 박탈하거나 친구를 정신적 강화제로 취급하려 들지는 않는다. 도구화는 서구 근대성의 여러 연관된 특징들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계몽주의는 고전적·기독교적 사고에 깊이 뿌리내린 주권적 자율 개인의 우위라는 사상을 결실로 맺었다. 수세기에 걸쳐 이 사상은 일종의 상식이 되었다. 각 개인은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며, 자신의 인생 이야기의 작가여야 한다. 자기표현과 자기결정은 진정한 자아를 이루는 필수 요소로 여겨진다.
   
권력이 소수에 의해 다수를 지배하던 시대에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자는 계몽 사상가들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결코 완전히 자율적일 수 없다. 근대성의 오류는 이 점을 간과하고 개인의 자유에만 지나치게 강조하며 상호의존성을 소홀히 한 데 있다. 이는 자율성의 중요성을 과장하여 개성 중시 풍조를 지나치게 부추겼다. 그 결과는 원자화다: 타인과의 분리가 지나치게 심해진 세상이다.
   
이 원자화된 세상은 도구화를 부추기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통제에 대한 환상을 조장한다. 자율성을 느끼도록 부추김을 받으면서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세상은 기회와 장애물을 똑같이 무작위적으로 펼쳐낸다.
   
우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우리는 근본적인 구성 요소들-성향, 성격, 재능, 한계-에 대해 선택권이 없었다. 사고와 의지의 숨겨진 원천에 직접 접근할 수 없으며, 단순히 원하는 것이나 믿는 것을 선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자유롭고 자율적인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하도록 길들여진 우리는, 원하는 무엇이든 이루기 위해 세상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행복, 건강, 성공은 올바른 선택만 한다면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세상은 우리의 의지에 굴복하도록 당겨야 할 레버와 눌러야 할 버튼의 연속이 된다.
   
요컨대 모든 것은 우리가 선택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자기결정권의 요구사항이기 때문이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의 자율적 주체성은 점점 더 소비자로서의 지위를 통해 표현되어 왔다. 자유란 무엇보다도 우리의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며, 필요한 모든 것이 현금과 교환될 수 있다는 약속이다.
   
소비자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구매하는 물건뿐만 아니라 모든 것과 관계 맺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세상은 본질적으로 거래적 성격으로 변모했다. 이는 모든 것이 다른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의미다.
   
데이트 앱이 마치 우리가 파트너를 쇼핑하듯 선택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관계조차도 소비자적 프레임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정치 역시 표를 거래하는 장터가 되어 유권자와 정치인 모두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경매의 최고 입찰자처럼 믿으며, 패배한 편을 지지한 자들은 저주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민주주의는 경쟁적 요구를 조정하는 방식이어야지, 승자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주는 제도가 아니다. 투표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소비자 사고방식 속에서 표는 권력을 사는 수단이 되었을 뿐, 더 이상 책임을 부여하는 수단이 아니다.
   
도구화의 또 다른 깊은 문화적 근원은 자연과학에서 은밀히 스며든 환원주의다. 환원주의란 사물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구성 요소로 분해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수세기 동안 자연과학에 유용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 한계에 대한 단서는 사회과학에서의 상대적 실패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 사회, 심리학은 단순한 기계적 과정으로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자연과학에서도 사물을 분해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는 것이 동등하게-때로는 더-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도구화의 배후에는 시스템을 무시하고 그 안의 요소들만 집중하는 조잡한 환원주의가 있다. 야외 활동과 같은 경험의 풍부함은 혈류 촉진이나 호르몬 분비라는 수단으로 축소된다. 종종 상충하는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은 특정 긍정적 감정을 유발하는 능력만으로 평가받는다. 기쁨뿐 아니라 고통과 상처도 주는 사회적 유대는 정서적 지지 원천으로 축소된다.
   
과대평가된 개인적 자율성에 대한 믿음, 거래적 소비자 정신, 사물의 작동 방식에 대한 환원주의적 태도가 결합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세상을 우리 자신의 웰빙을 증진시키기 위해 약탈할 수 있는 자원들의 집합체로 대하게 된다. 비극은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가장 깊은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 오히려 소홀히 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의 도구화를 우리가 역전시킨다면 문화는 어떤 모습이 될까? 물론 여전히 많은 일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할 것이다. 삶의 많은 좋은 것들이 도구적 이득도 가져다준다는 점에도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환영할 만한 부수적 효과로 보지, 그 목적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도구적 가치를 벗어난 세상은 바로 여기, 바로 지금 가치 있는 것에 더 주목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우정을 예로 들어보자. 타인으로부터 얻는 개인적 이익은 실재하지만 그것이 함께 있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관계가 가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지, 그들과 시간을 보내면 뇌에서 엔돌핀이 분비되기 때문이 아니다.
   
데이비드 흄은 200년도 더 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친구에게 선을 베풀 때 기쁨을 느낀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쁨을 위해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도구화를 거부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감정이 종종 잘 사는 데서 비롯되지만 그것이 바로 잘 사는 것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무언가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보다 그 자체의 가치로 감상하는 것은 해방감을 준다. 이는 우리가 하는 일이 항상 더 큰 목적을 위해 기여하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내적 압박에서, 그리고 우리의 하루하루를 미래에 쌓을 공로로 정당화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삶을 충만하게 산다는 것은 삶이 가져다주는 것을 온전히 감상하는 것이지, 거기서 현금화할 수 있는 이익을 추출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좋은 삶이 크고 작은 방식으로 매일 살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물과 사람들이 그 자체로 충분하며, 그들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추가적인 기능을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려준다. 삶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됨을 깨닫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삶의 충만함을 얻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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