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해볼 만힌 글이어서 공유합니다. (원문 발췌)
내가 처음 접한 아포리즘aphorism(경구)은 8살 때쯤 시카고 성공회 주교였던 제럴드 버릴의 다음 문장이었다: "바퀴자국과 무덤의 차이는 깊이뿐이다."
당시 나는 아포리즘이 뭔지도 몰랐다. 그 말이 뭘 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명언집에 담긴 그 문장을 비롯한 다른 문장들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건 알았다. 언어 유희와 역설, 재치 있게 뒤튼 표현들이 좋았다. 그렇게 간결한 문장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후 50년이 넘도록 바퀴자국과 무덤의 깊이를 두고 고민했다. 매일 내가 아침 출근길에 그저 걸어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서서히 나 자신을 묻어가고 있는 건지.
아포리즘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요즘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의 진부한 말장난이나 자기계발 전문가들의 평범한 조언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아포리즘은 기분 좋게 만들지 않는다. 손쉽고 깔끔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해법은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삶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하지 않고 있는지.
가령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는 아포리즘이 아니다. 너무 쉽기 때문이다. 별로 생각할 게 없다. 사고의 안일함을 부추긴다.
더 도전적이고 더 도발적이며, 따라서 더 아포라즘적인 것은 이를테면 폴란드 작가 막달레나 사모즈바니에츠의 이 말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우리 자신에 대해 가지는 것과 같은 의견을 우리에 대해 가지는 그 짧은 순간이다.
어떤 면에서 아포리즘은 지금의 짧은 형태의 소통 시대에 완벽히 부합한다. 간결하고 머리에 박히며 쉽게 소비된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나 현실에서나 요즘 우리가 보는대화 대부분은 짧고 강렬하고 주의를 끌지만 아포리즘과는 정반대다. 분노 유발, 욕설, 무분별한 독설, 허황된 확언, 해시태그성 허튼소리들이다.
이제 또 다른 증폭기 AI가 등장해 마찰 없는 우정과 아첨하는 동의로 우리의 인지 부하를 제로로 줄여주겠다고-사실은 창의적 사고를 대신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아포리즘은 다르다. 설익은 즉흥 논평과는 정반대다. 현재 수많은 정보 환경에 스며든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아첨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진부한 말은 정신의 위약이지만 아포리즘은 일종의 각성제다. 아포리즘은 논쟁을 유발하나 독단을 조장하진 않는다. 짧지만 깊이 있는 성찰을 촉진할 뿐 파블로프식 당파성을 부추기지 않는다. 양극화가 극심한 시대에 아포리즘은 심리적 차단기 역할을 하며 우리의 안이한 가정을 끊고 마음을 열고 주먹을 풀며 스스로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중요한 인생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면 예술가 제니 홀저의 조언을 명심하라: 안전하게만 가려는 태도는 장기적으로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이 말은 경력, 인간관계, 삶 전반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 결국 해로울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프랑스 시인, 화가, 영화감독이자 권투 프로모터였던 장 콕토의 이 경구는 어떤가: 거울은 이미지를 되돌려보내기 전에 좀 더 깊이 성찰하는 게 좋겠다.
노화와 장애, 죽음을 마주하거나, 역경에 맞서고 관계에서 고군분투하거나 창작의 벽과 개인적 도전을 헤쳐 나가는 것, 이 모든 것은 본래 어려운! 일이다. 바로 그 어려움이 핵심이다.
인공지능(AI)은 어려운 일을 쉬워 보이게 만드는 반면, 아포리즘적 지성(AI)은 어려운 일이 실제로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아포리즘은 기쁘게도 우리를 어려움 속으로 더욱 깊이 몰입시키고 무엇이 걸려 있는지를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의 인지적 부담을 증가시킨다.
많은 AI 연구자들은 ChatGPT 같은 도구를 과용하면 기술 의존성을 낳아 ‘메타인지적 게으름‘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도전적인 과제를 스스로 배우고 수행하기보다 외부 도구에 떠넘기는 버릇 말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게으름‘의 위험이다. 실존적 차원에서 도전적인 질문을 스스로 배우고 수행하기보다 외부 도구에 위임하는 것이다.
챗봇이 나를 대신해 노부모에게 전화를 걸고, 끊임없는 긍정과 인정만을 제공하며, 내 모든 문자, 이메일, 감사 편지(시, 시나리오, 소설은 말할 것도 없이)를 작성한다면 나는 내 정신적 감정적 삶의 관객이 되고 만다. 비판적 창의적 사고는 시들어가고, 사고의 본질 자체가 내성에서 외주로, 큰 그림을 보는 것에서 숫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변한다.
오스트리아의 경세가 마리 폰 에브너-에셴바흐가 말했듯이, 목적지까지 실려간 자들은 그곳에 (자신이) 도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처음 접한 아포리즘aphorism(경구)은 8살 때쯤 시카고 성공회 주교였던 제럴드 버릴의 다음 문장이었다: "바퀴자국과 무덤의 차이는 깊이뿐이다."
당시 나는 아포리즘이 뭔지도 몰랐다. 그 말이 뭘 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명언집에 담긴 그 문장을 비롯한 다른 문장들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건 알았다. 언어 유희와 역설, 재치 있게 뒤튼 표현들이 좋았다. 그렇게 간결한 문장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후 50년이 넘도록 바퀴자국과 무덤의 깊이를 두고 고민했다. 매일 내가 아침 출근길에 그저 걸어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서서히 나 자신을 묻어가고 있는 건지.
아포리즘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요즘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의 진부한 말장난이나 자기계발 전문가들의 평범한 조언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아포리즘은 기분 좋게 만들지 않는다. 손쉽고 깔끔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해법은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삶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하지 않고 있는지.
가령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는 아포리즘이 아니다. 너무 쉽기 때문이다. 별로 생각할 게 없다. 사고의 안일함을 부추긴다.
더 도전적이고 더 도발적이며, 따라서 더 아포라즘적인 것은 이를테면 폴란드 작가 막달레나 사모즈바니에츠의 이 말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우리 자신에 대해 가지는 것과 같은 의견을 우리에 대해 가지는 그 짧은 순간이다.
어떤 면에서 아포리즘은 지금의 짧은 형태의 소통 시대에 완벽히 부합한다. 간결하고 머리에 박히며 쉽게 소비된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나 현실에서나 요즘 우리가 보는대화 대부분은 짧고 강렬하고 주의를 끌지만 아포리즘과는 정반대다. 분노 유발, 욕설, 무분별한 독설, 허황된 확언, 해시태그성 허튼소리들이다.
이제 또 다른 증폭기 AI가 등장해 마찰 없는 우정과 아첨하는 동의로 우리의 인지 부하를 제로로 줄여주겠다고-사실은 창의적 사고를 대신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아포리즘은 다르다. 설익은 즉흥 논평과는 정반대다. 현재 수많은 정보 환경에 스며든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아첨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진부한 말은 정신의 위약이지만 아포리즘은 일종의 각성제다. 아포리즘은 논쟁을 유발하나 독단을 조장하진 않는다. 짧지만 깊이 있는 성찰을 촉진할 뿐 파블로프식 당파성을 부추기지 않는다. 양극화가 극심한 시대에 아포리즘은 심리적 차단기 역할을 하며 우리의 안이한 가정을 끊고 마음을 열고 주먹을 풀며 스스로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중요한 인생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면 예술가 제니 홀저의 조언을 명심하라: 안전하게만 가려는 태도는 장기적으로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이 말은 경력, 인간관계, 삶 전반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 결국 해로울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프랑스 시인, 화가, 영화감독이자 권투 프로모터였던 장 콕토의 이 경구는 어떤가: 거울은 이미지를 되돌려보내기 전에 좀 더 깊이 성찰하는 게 좋겠다.
노화와 장애, 죽음을 마주하거나, 역경에 맞서고 관계에서 고군분투하거나 창작의 벽과 개인적 도전을 헤쳐 나가는 것, 이 모든 것은 본래 어려운! 일이다. 바로 그 어려움이 핵심이다.
인공지능(AI)은 어려운 일을 쉬워 보이게 만드는 반면, 아포리즘적 지성(AI)은 어려운 일이 실제로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아포리즘은 기쁘게도 우리를 어려움 속으로 더욱 깊이 몰입시키고 무엇이 걸려 있는지를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의 인지적 부담을 증가시킨다.
많은 AI 연구자들은 ChatGPT 같은 도구를 과용하면 기술 의존성을 낳아 ‘메타인지적 게으름‘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도전적인 과제를 스스로 배우고 수행하기보다 외부 도구에 떠넘기는 버릇 말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게으름‘의 위험이다. 실존적 차원에서 도전적인 질문을 스스로 배우고 수행하기보다 외부 도구에 위임하는 것이다.
챗봇이 나를 대신해 노부모에게 전화를 걸고, 끊임없는 긍정과 인정만을 제공하며, 내 모든 문자, 이메일, 감사 편지(시, 시나리오, 소설은 말할 것도 없이)를 작성한다면 나는 내 정신적 감정적 삶의 관객이 되고 만다. 비판적 창의적 사고는 시들어가고, 사고의 본질 자체가 내성에서 외주로, 큰 그림을 보는 것에서 숫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변한다.
오스트리아의 경세가 마리 폰 에브너-에셴바흐가 말했듯이, 목적지까지 실려간 자들은 그곳에 (자신이) 도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