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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와 책 없는 세상

더듬이
2025-11-12 05:59
소크라테스와 책 없는 세상

이 글에서 나는 2400년 전 소크라테스가 바랐던 세상이 '책 없는 세상'이었다는 주장을 펼 생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책 있는 세상'을 경계했다. 그는 책의 확산이 인간 소통에 초래할 위험을 예감했고, 그것이 우리 일상에서 인간으로서 진정 가치 있는 활동을 대체하거나 위협할 거라고 봤다. 그 활동이란 그가 소중히 여겼던 철학(지혜의 사랑), 즉 서로 삶의 중요한 주제에 관해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무지를 깨달아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게 만드는 대화였다.

소크라테스의 알려진 발언에 기대어 나는 책이 인간의 생각을 자신과 분리한 외부화externalize의 첫걸음이었으며, 그것이 근대의 누적적인 지식 권력의 모양을 거쳐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온라인 검색에 이어 인공지능AI 시스템의 형태로 진화해 급기야 우리의 사고와 소통을 장악할 상황에 이르렀다고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사람 간의 대화가 점점 폭과 깊이를 잃어가는 한편 기계와의 채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심지어 사람 간 소통도 기계를 닮아가는 것은 그 전조다. 지금 세상에는 책을 힘의 확장 도구로 보는 지배적 견해와 대화의 도구로 보는 소수 견해가 공존한다. 지금 추세라면 AI가 책까지 대신하는 세상은 시간문제일 것처럼 보인다. 그 '책 없는 세상'은 역설적이게도 소크라테스가 경계했던 '책 있는 세상'의 필연적 귀결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왜 책을 경계했나
소크라테스도 지금 우리와 같은 매체 혁명기에 살았다. 그때는 말에서 글로 옮겨가는 전환기였다. 소크라테스도 적어도 한때는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서 『자연에 관하여』를 에우리피데스로부터 선물 받아 읽고서 호평했다는 기록이 있고, 아낙사고라스의 저술에 심취했다가 실망하고는 자기만의 철학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고백도 전한다.

정작 자신은 책을 쓰지 않았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자 플라톤이 쓴 책 덕분이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드로스』에 문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의견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대화록에서 소크라테스는 문자 발명에 관한 신화로 자기 생각을 내비친다. 신화 속에서 이집트의 신 테우트는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발명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문자를 '기억의 약이자, 지혜의 약'이라며 타무스 왕에게 권한다. 그러자 타무스는 문자는 파르마콘pharmakon(약이자 독)이라며, 그것이 초래할 해악들을 열거한다.

첫째는 글에 의존하면 기억력이 감퇴한다는 것. 사고 외주화의 위험이다. "기억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 함으로써 배운 사람들의 혼에 망각을 줄 거요." 둘째는 자신의 지혜로움을 오인하게 만든다는 것. 안다는 착각의 위험이다. "그것은 배우는 사람에게 지혜로워 보이는 의견을 주지 진상을 주지는 않소. 왜냐하면 그들이 많이 듣게 되면서 가르침이 없어도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대개의 경우 사실은 무지하며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이오." 셋째는 저자의 뜻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될 거라고 믿는 것. 오독과 곡해의 위험이다. "일단 글로 쓰이면, 모든 이야기는 전혀 격에 맞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나 똑같이 아무 데나 돌아다니며, 가리지 않고 다 말할 거요. 게다가 그것이 잘못 곡해되거나 부당하게 욕을 먹게 되어도 스스로 방어할 길은 없다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사람의 생각에서 떨어져 나와 글의 형태로 응고된 지식이 독립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지식의 물신화, 나아가 권력화의 위험이다.

본래 문자는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정치와 종교 권력의 토대인 법전과 경전을 낳았고, 회계와 행정 문서를 통해 자본주의와 관료국가를 구축했다. 또 과학 기술과 결합해 산업사회를 가능케 했으며,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인터넷과 인공지능 사회에 이르게 했다. 인간의 지적 생성물이 사물화하기 시작했을 때 인간과는 별개의 '낯선 지능Alien Intelligence'의 출현은 예견된 일이었다. 플라톤은 왜 책을 썼나 소크라테스의 경고에도 책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토대가 됐다. 그 토대에 주춧돌을 올린 인물이 그의 제자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저술에 진심이었다. 지금껏 전해지는 것만 35권이다. 이 중 10권은 위서로 의심받지만 참작해도 적지 않은 수다.

플라톤은 왜 책을 썼을까.
청년 시절부터 소크라테스를 추종했던 그가 스승의 사형 과정을 지켜보며 언행을 기록으로 남길 의무감을 느꼈을 수 있다. 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우려는? 플라톤도 글의 한계는 의식했던 것 같다. 그는 유작 『일곱 번째 편지』에서 진리가 글로 표현되거나 전달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길게 썼다. 그렇다면 그가 남긴 책은 뭐란 말인가? 그는 죽기 전까지도 자신의 주저 『국가』의 도입부를 여러 번 고쳐 썼다는 말도 전한다.

그는 글의 한계를 알았지만 동시에 어떤 가능성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은 글을 통한 철학으로의 인도다. 그가 남긴 저술의 형식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같이 대화들이다. 자기 생각의 일방적 서술이 아니라 등장인물 간 문답이다. 인물은 소크라테스를 필두로 철학자, 소피스트, 정치가, 장군, 웅변가, 극작가, 노예 등 다양하다. 대화의 배경도 시장, 체력단련장, 연회장, 강변 등 갖가지 일상의 현장들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곳곳에서 나눈 대화를 옮겨놓은 모습이다. 대화의 주제는 앎, 용기, 절제, 정의 같은 철학적 소재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로 철학을 했다면 플라톤은 글로 철학적 대화를 재현하려 했다. 고전학자 에릭 해블록은 심지어 플라톤이 말의 문화oral culture에서 글의 문화literal culture로의 전환을 주도했다고 해석한다. 즉, 전통적인 시적 구술성의 폐단을 비판하고, 글을 통한 논리적 사유, 즉 문어적 사고의 길을 연 것으로 평가했다.*(*말의 문화에서 글의 문화로의 이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미디어 이론가인 월터 옹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체계적으로 상술한 바 있지만, 최근 또 다른 미디어학자 안드레이 미르는 『Digital Future in the Rearview Mirror』에서 인류는 '잠시' 영위했던 문해력 시대에서 이제 다시 '디지털 구술시대'로 회귀할 조짐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답을 논박하는 데 주력한다. 끊임없는 문답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려는 철학의 과정을 보여준다. 대화는 확답이나 결론으로 종결되기보다 '막다른 지경aporia'에 봉착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때 대화자들은 어떤 경이wonder를 느끼게 된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경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의 상태"라고 썼다. 소크라테스가 고백한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무지의 지知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대화는 답보다 더 많은 질문을 남기고, 열린 결말은 또 다른 대화를 부른다. 철학적 탐구는 계속되는 역동적인 대화와 토론의 과정이다. 한 영혼이 또 다른 자신과 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경고와 글의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기대 사이의 불일치를 철학적 대화 형식의 문학으로, 창의적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도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질문이나 논박보다 설명의 비중이 커진다. 동시에 플라톤 자신의 생각이 점점 짙게 투영된다. 가장 긴 작품이자 마지막 저술인 『법률』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아예 없다. 어쩌면 그의 저술에서도 대화의 정신은 서서히 소멸해간 셈이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책은 살아남았다. 그것도 대단히 성공적으로. 유럽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뤄졌다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글은 인간의 말이 지닌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했다. 기억을 기록으로 바꾸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게 했다. 지식은 글이라는 단단한 구조물로 끊임없이 누적될 수 있었다. 글은 눈에 보이지 않던 자신과 남의 생각을 볼 수 있게 했다. 덕분에 대상과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성찰과 비판적 사고, 추상적 사유가 깊이를 더해갈 수 있었다. 글은 인간의 가소적 뇌를 길들이는 문화적 도구로 자리 잡아 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남은 책과 사라진 책
플라톤을 뒤이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기록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150 여 편에 이른다. 아쉽게도 전해지는 것은 29 편 정도다. 그의 저술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강의를 위한 내부용과 일반 대중을 상대로 펴낸 외부용 두 가지였다. 지금 남아 있는 저술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Corpus Aristotelicum' 은 모두 전자로 추정된다. 강의 노트나 학생용 교재로 작성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필사와 재편집 과정에서 재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대체로 난해하고 건조하다. 반면 외부용은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플라톤의 대화편과 유사했다. 현존하는 몇몇 단편을 보면 알 수 있다. 대화편들은 의도적으로 일반인도 즐길 수 있게 쓴 것으로 보인다. 고대 문장가 키케로는 플라톤의 ' 달콤한 대화체'를 칭송했지만, 플라톤의 글이 ' 은'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 흐르는 금의 강'이라고 평했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편을 다 봤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식물에서부터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걸쳐 체계적인 저술 활동을 펼쳤지만, 동시에 플라톤이 본을 보인 철학적 대화로서의 글쓰기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갈래 중 대중을 상대로 한 대화편은 지금 거의 모두가 유실된 데서 보듯이 그 저술 형식 또한 잊혀갔지만, 내부용이었던 보다 전문적인 저술 방식은 점점 공고해져 유럽 지식 엘리트의 스콜라주의 문화를 형성했다. 스콜라주의란 수도원을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가톨릭 신학과 조화시키려 했던 학문과 교육의 방법론으로 권위 있는 텍스트의 엄밀한 해석과 치밀한 논리의 구성이 특징이었다. 수도원 학교는 유럽 대학의 기초가 되었고 현대 학문과 교육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스콜라주의의 사변적 흐름과는 또 다른 지식의 새로운 물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아는 것은 힘'이라는 명제로 대표되는 보다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과학의 거대 조류였다.

아는 것이 힘: 지식 권력
지식을 힘의 추구와 연결한 주역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그의 1597 년 저서 『신성한 명상록Meditationes Sacrae』에 나오는 '아는 것 자체가 힘ipsa scientia potestas est'이라는 말은 무엇보디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의미했다. 베이컨은 자연을 인류의 번영을 위한 광대한 자원으로 봤다. 그에게 지식이란 인간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확장하는 데 활용될 실용적 도구이자 사회적 권력의 자원이었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학문이 '쓸모가 없다'라고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를 지식의 도구로 보고 『오르가논Organon(기관)』을 저술했는데 주요 기반이 연역법이었다. 이에 맞서 베이컨은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신 기관)』을 써서 '새로운 도구'인 귀납법을 주창했다. 관찰과 실험을 통한 귀납적 지식만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데 쓸모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지식은 덕이었지만 베이컨에게 지식은 힘이었다. 베이컨 자신이 ' 쓸모 있는' 귀납적 지식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뉴턴을 비롯한 17세기 과학 혁명의 주역 중에는 베이컨의 저작과 사상에서 영감을 얻은 사람이 많았다. 이들을 주축으로 탄생한 것이 근대과학의 상징인 영국 왕립학회였다.

'지식이 힘'이라는 구호는 후대에 와서 지식 권력론으로 증폭됐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지식이 부와 폭력 같은 전통적 권력을 압도하며 최고의 권력이 된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경제는 지식을 토대로 발전해왔다. 지식의 진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문자와 숫자 같은 사고와 의사소통 도구들의 발명이었다. 근대의 소통 도구가 책이었다면, 현대는 정보통신기술, 즉 컴퓨터와 인터넷망이다. 여기에 최근 인공지능이 새로운 도구로 추가됐다.

현대인은 베이컨의 충실한 후계자다. 개인, 기업, 국가 모두가 정보를 두고 경쟁한다. 정보야말로 힘이고 자산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정보는 콘텐츠로도 불린다. 책 또한 콘텐츠의 일부로 녹아든다. 오늘날 사회를 지식 사회라 부르고, 어느 나라나 지식 강국을 지향한다. 교육은 산업이 되었고, 각종 사교육이 학교를 압도한다. 기업이나 국가가 독서를 강조할 때도 대개는 이런 지식 쌓기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베스트셀러도 승자를 꿈꾸는 재테크나 자기계발서 아니면 패자를 달래는 '힐링' 유의 도서다.

다성 교향악인 문학
그와는 다른 책의 세계로 통하는 길도 있다. 가령,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이 제시한 길이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분석을 통해 바람직한 문학의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이 길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거리에서 시작했고 플라톤이 대화편으로 계승한 철학적 대화의 길과도 통한다. 대표적인 개념이 다성성polyphony과 미결정성이다.
바흐친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자유롭게 내도록 해준다. 또한 작가 자신이 등장인물의 운명을 결정짓지도 않는다. 미결정 상태에 둔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공존과 상호작용의 노력임을 알고 함부로 결정될 수 없는 것임을 안 비범한 작가다.

바흐친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사회 속 개인의 다양한 목소리와 발언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시도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소설 속에서 다양한 세대와 나이, 집단, 성향, 정치 사회적 목적의 이질적 언어들이 교차하고 충돌하면서 대화적 관계를 형성한다. 다양한 인물들의 이질적 언어들은 특정한 관점과 형식들을 지닌 채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고 서로에게 작용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설의 언어는 거대한 오케스트라, 대화적 언어, 상호 관계성의 언어, 혼성의 언어가 된다. 세상에서 아직 결정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세상과 세상에 관한 최종 판단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세상은 열려 있고 자유로우며, 모든 것은 여전히 미래에 있으며 영원히 미래에 있을 것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이 말은 한 사람이 결코 완전히 바깥에서 정의될 수는 없음을 뜻한다. 타인의 객관화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능력은 인간의 주체적 의식에 필수적이다. 설령, 밖에서의 확정, 가령 정의나 기술, 인과적 혹은 발생적 설명 같은 것이 불가피하고 심지어 필요하더라도, 그것은 살아 있는 주체의 반응이 배제되는 한 전체의 진실이 될 수 없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을 객체로 전락시키는 사고방식, 즉 근대 사회로 오면서 당연시된 과학적, 경제적, 사회적, 심리학적 정의에 따른 인간 이해에 반대하며 글을 썼다고 봤다. 객관적 개념 틀은 인간을 정의와 인과관계라는 이질적인 그물에 가두어 자유와 책임을 박탈한다.

"그는 그 속에서 한 사람의 영혼을 비하하는 물화物化, 그 자유와 비결정성을 무시하는 것을 보았다. (···) 도스토옙스키는 항상 인간을 최종적 결정의 문턱에 서 있는 존재, 위기 순간에 놓인 존재, 영원히 결정될 수 없고 미리 정해질 수 없는 영혼의 전환점에 있는 존재로 묘사한다."(*바흐친,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문제들』)
바흐친이 주목하고 희구했던 것도 개성적 인간이 지닌 다양한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대화의 복원과 보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책 없는 세상
20 세기 SF 의 고전들은 거의가 미래 사회를 '책 없는 세상'으로 그렸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가 그렇고,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이 그렇다. 2025년, 아직은 '책 있는 세상'이다. 앞으로도 그럴까. 책의 운명은 독자의 유무에 달렸다. 통계의 추세로 보면 낙관할 수 없다. 책 읽는 사람은 늘 소수였다. 문제는 읽던 사람마저 점점 눈이 폰에 가 있는 시간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에서 찾던 것을 이제는 훨씬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 스마트기기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게 길들고 있기 때문이다.

웬만한 지식의 창구는 온라인 검색에서 AI 챗봇으로 옮겨갔고, 원하는 오락에 관한 한 AI 알고리즘이 사용자 취향을 더 잘 안다. 에이전트 AI 는 책의 대역 차원을 넘어 대화 상대로서 인간의 자리를 대신한다. 친구이자 연인, 교사이자 상담사, 디지털 신탁으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인문적 소양을 겸비한 재런 러니어는 앞으로 모든 콘텐츠를 학습한 AI 가 허브 역할을 하면서 모든 콘텐츠가 통합될 것으로 봤다. 여기에는 책도 포함된다. AI 에 적절한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즉석에서 단행본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출력물을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불가사리처럼 모든 콘텐츠를 빨아들이는 AI 가 책을 흡수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AI 는 인간의 거울이다. 언제나 인간의 생산물을 학습하고 재가공해 보여준다. 어디까지나 원천 데이터는 인간의 생성물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기계는 스스로 의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AI 의 생성물엔 아무리 새로워 보여도 인간의 혼적이 배어 있다. 모든 것에는 원천 데이터에 스며 있는 인간의 가치와 이념이 내재한다. 엔지니어들은 흔히 AI 의 실행 목표와 인간의 가치를 일치시키는 '가치 정렬'의 문제를 난제로 이야기하지만, 사회적으로 큰 문제는 AI 가 현재의 지배적 가치 질서를 확대 증폭 재생산한다는 데 있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 불평등 심화, 새로운 부족주의, 소비주의 등은 바로 지금 우리 삶의 지배적 방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것을 학습한 AI 가 쏟아놓는 답은 바로잡아야 할 현실을 오히려 더 공고히 할 수 있다.

모두의 대화 상대가 되어 가는 봇은 사람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억의 사용자와 상호작용을 한다. 사용자는 필요한 정보만 구할 뿐만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털어놓고 답을 듣는다. 하지만 AI 는 대화를 하는 게 아니다. 대화를 모방할 뿐이다. 그것도 대단히 잘, 모방은 원본과 같지 않지만, 원본의 단면을 더 그럴듯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잘 속아 넘어간다. 마술의 원리다.

이런 결말은 애당초 기계의 응답이 인간인 것처럼 보이면 지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자는 튜링 테스트의 판정 기준에서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무엇인 것처럼' 보이면, '정말 무엇인 것'으로 보자는 지적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 모방 게임을 벌이며 문명 차원에서 판돈을 키워가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더 증폭되어 다가온다. 말이 글로 떨어져 나갈 때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지혜'를 대체하고, 그것이 오히려 지혜를 혼동하게 만들어 '지혜 아닌 것'이 '지혜'인 양 군림하려 들지 모른다는 경고 말이다. 우리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좋은 삶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묻고 토론하지 않고, 새로운 신탁이 되어 가는 AI 봇에게서 들으려 한다.

소크라테스가 '책 없는 세상'을 바란 것은, '책 있는 세상'을 경계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가 희구했던 것은 다양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덕을 비롯한 여러 주제를 놓고 대화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성찰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앞선 철학자들의 의견을 차례로 검토한 후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고 인간 자신에 대한 앎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리의 삶과 살아가는 세상을 낫게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 문제를 혼자서 궁리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을 고독한 고뇌가 아닌 인간의 협력적 노력으로 여겼다. 골방에 은둔하지 않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갔다.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협력해 철학을 실천했다. 스스로 스승을 자처한 적이 없었고 누구에게든 가르침을 청했다. 그런 대화를 통한 서로 돌봄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함께 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최상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법정에서도 자신의 그런 삶을 변론했고, 감옥에 갇힌 후 독배를 드는 순간까지도 벗들과 철학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그가 마지막까지 즐겼던 것은 살아 있는 영혼 (정신) 간의 대화였다. 그에 비하면 글은 잘해야 '그림자'일 뿐이었다. 살아 숨 쉬는 대화를 글로 적기 시작했을 때 인류는 생각의 박제화, 물신화의 위험을 무릅쓴 길로 나선 것이었다. 지금 AI 신탁의 조짐은 그래서 불길하다.

그러나 글로 된 기록을, 말 없는 책을 다시 살아 숨 쉬는 대화의 불쏘시개로, 대화 확장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 그 길로 가는 다리 중 하나가 나는 독서 모임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책을 매개로 대화의 꽃을 피우는 것. 여기에는, 잘만 사용하면 AI 또한 좋은 보조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PF(파페) 출간 <책 없는 세상 - 논픽션> 123-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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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봉천동 조지오웰 | 19일 전
북펀딩에 기고하신 에세이를 여기도 올려주셨군요.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책 없는 세상 - 논픽션>책은 잘 받아봤습니다!
- "우리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좋은 삶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묻고 토론하지 않고, 새로운 신탁이 되어 가는 AI 봇에게서 들으려 한다"
- "그러나 글로 된 기록을, 말 없는 책을 다시 살아 숨 쉬는 대화의 불쏘시개로, 대화 확장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 그 길로 가는 다리 중 하나가 나는 독서 모임이라고 생각한다"
봉천동 조지오웰 | 19일 전
문단들 사이에 줄바꿈 한 번씩만 해주시면 홈페이지에서도 읽기 좋을 것 같아요~
더듬이 | 19일 전
산이화 | 18일 전
이번 주 함께 만날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와도 닿아있는 내용인것 같아서 잘 읽었습니다.
근데, 후반부 '책없는 세상' 문단 중에서 AI는~으로 시작되는 단락 중, 뒷부분 '재로운 부족주의'가 무엇일까요?
혹시 '새로운 부족주의'? 잘 몰라서 여쭙니다.^&^
더듬이 | 18일 전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오자네요. 고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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