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서해 프로필 서해
2026-05-21 21:01 (수정됨)
자전거 타고 동쪽으로 20분. 동산을 깎아 만든 2차선 도로가 있다. 터널을 만들 기술이 없을 때 만든 게 분명하다. 일반 육교의 3배는 되어 보이는 폭이 좁은 다리가 있는데, 풀이 무성하고 콘크리트에 금이 많으니까, 누구라도 그리 짐작할 것이다. 굳이 동산을 오르지 않아도 도로와 동산 지면의 높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본 중국 도심 같기도 했다. 가끔 부모님 차 뒷좌석에서 지나칠 때 그 다리는 늘 위태롭다는 인상이었다. 오늘 자전거를 타고서 처음으로 그 거리를 지났다. XX대학 강의를 듣기 위함이었으며, 구도심인지라 인도는 쓸만한 데가 적었고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예상보다 애를 많이 썼다. 도착 예상 시간에서 이십 분 초과되어 한 시간이나 걸렸으니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주변을 살폈다. 비가 내린 지 얼마 안 되어 습기 때문에 머리가 가려워 헬멧을 벗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까 그 다리를 봤고 고풍스런 난간과 담쟁이 풀을 봤고 습기 머금은 금을 따라 훑었다. 전방을 주시했고 울어있는 보도블록을 봤고, 지렁이를 봤다. 다소간의 경사가 있어 힘을 내어도 너무 내어 페달을 밟았으며 나의 브레이크 패드는 닳아도 한참 닳았기 때문에, 그 지렁이 위를 지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어찔했고 그 지렁이를 뒤돌아 보진 못하였다. 아마 꿈틀댔으리라. 동산의 깎인 도로에서 다리를 지나쳤고 묘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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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몽각 프로필 몽각 | 18일 전
연일 비가 온 모양이다. 지붕이 날아간 듯 빗물이 한없이 밀려 들어 살고 있는 지하 연립주택에 물이 흥건하다. 나는 피부로 호흡하기에 촉촉하게 젖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다. 가뭄에 말라 죽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너무 습하면 질식해서도 죽게 된다. 오늘 같은 날도 도저히 습해서 견디기 힘들어 밖으로 나선다. 이럴 때 시간과 장소를 조심해야 한다. 어떤 시각 어떤 곳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어서 밖으로 나서는 순간 곧장 발에 밟혀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그래도 살아서 도망쳐 나올 수는 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곳은 육중한 바퀴들이 쉴새없이 굴러 다니는 도로다. 뭔가 의식할 새도 없이 세상과 작별하는 수가 있다. 조심조심 나가본다. 이곳은 좀 한적한 곳 같다. 다행이... 헉!
정신을 차려 본다. 아까 뭔가 내 몸 위로 지나갔다. 그 순간까지는 기억이 난다. 다행히 내 뇌와 심장이 있는 머리 쪽은 피해 간 것 같다. 이렇게 의식이 있어서 기억을 하고 고통이라도 느끼고 있는 걸 보면. 몸의 곳곳에서 보내오는 신호로 보니 그 무엇은 내 허리께를 지나갔고, 그 아랫도리는 잘려나간 것 같다. 애석하지만, 그거야... 우리 할매가 내 어릴 적부터 일러 주신 말씀이 있다. 시간이 약이라고, 이 또한 다 지나간다고. 내 정신만 살아 있다면 잘려나간 내 하반신이야 또 자랄 것이고, 자라지 못하더라도 내가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 그런 기대로 다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저들의 눈에는 그저 꿈틀대는 줄로만 알겠지만.
서해 프로필 서해 | 18일 전
나는 집에서 진즉에 말라버린 물티슈 두 장 꺼내어 물을 묻혔다. 자전거 프레임을 닦기 위함이다. 자전거에 묻어있는 게 온전한 진흙처럼 곧잘 닦이지는 않았다. 곤충이나 파충류쯤 되는 시체의 조각들이 섞여있었다. 어제 그 다리 밑의 지렁이일 수 있으리라. 자연스럽게 나는 어제의 잔혹 행위를 생각했다. 여기서 '생각’이란, 사고한다기보다는 공상에 더 가까웠다. 나는 어제 그 도로를 생각했다. 협곡이라고 묘사해야 할지, 아니면 군 입대하는 예비 장정의 바리캉에 밀려가는 머리로 묘사해야 할지,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 깔린 송장으로 묘사해야 할지. 내가 바라본 그 도로는 내게 위협적이었으므로, 나름대로의 묘사를 하려 노력한 것이다. 연상되는 게 폭력적이었으므로, 폭력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사고라 할 수 있겠다. 총질 그만, 핵 그만, 전쟁 그만. 나는 이런 걸 외쳤었고 진정 폭력의 정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지금껏 나는 이 도시에서 걸었고, 자전거 페달을 굴렸고, 가끔 차를 운전했고, 기차에서 창 밖을 보며 감상에 젖었고, 비행기에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지나온 그 길에 지렁이를 밟았다. 지렁이에게 나는 다른 바리캉이자 탱크이지 않은가. 게다가 내가 밟고 섰는 이 아스팔트의 위엄을 생각했고 나는 정말 총질 그만, 핵 그만, 전쟁 그만을 외칠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비린내를 동반한 시체 조각들을 닦아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