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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점 아저씨의 흰 안대

더듬이
2025-10-17 11:00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정확하지 않다. 한 10년은 되지 않았을까. 지금 자전거를 나는 온라인에서 5만원을 주고 샀다. 지금껏 그 가격의 수십 배, 수백 배 이상의 가치를 누렸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타이어 표면의 양각마저 다 닳다시피 해 달리다가 펑크가 나는 건 아닐까 걱정마저 들지만 (오늘 이야길 들어보니 고무 타이어 안에 실밥이 얽혀 있어서 그게 드러날 정도가 되어야 수명이 다한 것이라고 해서 안심했다.) 만일 더 이상 탈 수 없게 되면 어딘가에 나의 기록물로 보존해 두고 싶을 정도다.
자전거를 좋아한다. (자전거를 가지고 인간과 기술,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관한 멋진 책 한 권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오래전 김훈 작가가 자전거에 관한 에세이집을 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자신이 아끼는 자전거에 대해 얘기한 걸 읽었다. 꽤 고급 브랜드에 고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는 전국을 자전거로 누비고 다닐 정도의 바이커였으니 그 정도의 장비를 갖춰야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양재천변 자전거로를 기분 전환 삼아 오르내리거나, 집에서 지하철 역이나 가게 정도를 오가는 셔틀 용도로 장만한 것이어서 최저가로도 충분했다.
그 후 자전거가 잔병치레를 할 때마다 동네 자전거 가게를 찾게 되었는데, 그때 집 도로 건너편에 있던 자전거방 주인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 그곳에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주인은 사십대 초반에 왜소한 체구의 남자였다. 왠지 안스러워 보이는 구석이 있었지만 자신의 일과 사업에 대한 의욕이 야무져 보였다. 무엇보다 자전거로 일찍 잔뼈가 굵은 것 같은 식견과 손놀림에 신뢰가 갔다. 비용 책정도 잘은 몰라도 양심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내 자전거부터가 싸구려이니 수리비도 값이 나갈 턱이 없었다. 브레이크가 느슨한 것 같으니 봐달라거나, 기어 전환이 신통치 않으니 수리해 달라는 따위의 소소한 주문은 사실 자전거방 주인으로서는 정말 돈이 되지 않는 귀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매번 다른 일을 미뤄 놓고 내가 보는 앞에서 설명을 해가며 뚝딱 해결해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한쪽 눈에 흰색 안대를 착용한 것을 보게 되었다. 처음엔 눈에 다래끼가 난 줄로만 알았다. 물어보지도 않고 말았는데 한참 뒤에 다시 보게 되었을 때도 안대가 여전했다. 그때 나는 아저씨의 눈에 문제가 생겼구나 싶은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더 묻지는 못한 채 짐작만 하고 말았다.
그 후 언젠가 자전거점이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는 다른 업종이 들어섰다.
그러다 집에서 좀 떨어진 사거리 건널목을 지나다가 조금 떨어진 도로변에 자전거점이 새로 문을 연 걸 보게 되었는데 들어가 보니 예전의 그 자전거점 주인이었다. 눈에는 흰 안대가 여전했다. 그제서야 그때의 어떤 일이 실명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차마 묻진 못했으니 알았다기보다 확신이라고 해야겠다)
오늘 다시 브레이크의 느낌이 좋지 않아 오랜만에 찾아간 그 자전거점의 주인 아저씨는 여전히 친절했고 싹싹했고 솜씨가 좋았다. 이번엔 앞뒤 브레이크를 통째로 갈아야 한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했다. 모두 해서 3만원. 주머니의 카드를 내미니, 수수료 3500원을 추가해야 한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했다.
손으로 정성스레 수리를 해주시는 모습에 나는 왠지 내가 지불하는 3만원이 너무 약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선심 쓰듯 더 받으세요라고 할 자신은 없었다. 자칫 그분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돌아오며 자전거의 브레이크를 시험 삼아 잡아 보니 새 자전거처럼 아주 잘 먹혔다.
그러면서도 오는 내내 그 아저씨의 안대에 가려진 한쪽 눈이 생각났고, 그런 상태에서도 작은 자전거점을 꾸준히 이어가는 그분의 남모를 애환과 수고를 뒤덮고 있는 성실함이 겹쳐졌고, 그 수고의 대가가 다 합쳐서 3만원이라는 사실이 그 위로 다시 무겁게 포개졌다.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서 뜨끈한 물이 새 나와 가슴속 한 귀퉁이를 적시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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