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가

2411 시즌 - 책 <작별하지 않는다>
경비병
2024-11-14 01:18
전체공개

지나치게 뜨거운 그걸 천천히 먹는 동안,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깨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 책 본문 중

제주도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육체가 부서졌는가? 가족 중 한 사람이 정치적인 강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단지 이장과 통장이 자신의 이름을 임의로 적어냈다는 이유로,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이름을 보도연맹에 올렸다는 이유로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이 끊어졌는가?

그들은 어딘가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죽음을 염두에 두거니와 소신을 다하기라도 하지... 그저 평소 같은 내일을 살아가고자 했다. 살고자 쌀과 비료를 받았는데 그 때문에 죽었다. 너무나도 잔인하게 죽었다.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군인들의 명령에 열 명씩 서서 꼬구라지고 있을 때 엄마와 어린 자식이 함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에게 ‘죄없는 우리 자식들 만은 살려주소’라고 얼마나 빌었겠는가, 그 자신도 죄 없이 끌려왔으면서 말이다. 군인은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열 명씩 앞에 나갈 때도 가족 모두가 열 명에 포함되도록 배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자식이 먼저 나가서 벌벌 떨다 육체가 부서지는 모습을 봤을 수도 있다. 너무나 잔인하다. 부모는 한 단계 체념하며 마음속으로 울며 빌었을 것이다. ‘제발 우리 자식 고통 겪지 않게 한 번에 보내주셔..’ 그런데 군인들은 이것조차도 배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채로 차가운 파도에 쓸려 다녔을 수 있다.

학살 증언 중 ‘다음 열 명을 또 나오렌 하난 서로 안 나가젠 줄이 흐트러져서’ 라는 대목이 가슴에 깊게 파고들었다. 삶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마음과 죽음에 대한 억울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마나 내일을 바랐을까. 이루고 싶은 꿈, 보고 싶은 사람, 나누고 싶은 사랑, 먹고 싶은 음식, 읽고 싶은 책… 그 모든 것이 10미터 앞 방아쇠에 올려져 있는 손가락 하나에 달려있다. 그 모든 것이.. 모든 삶이. 하나의 세계가... 손가락 까딱에 어둠이 되어버린다. 육체는 너무나도 나약하다. 외부의 힘에 의해 언제라도 부서지고 끊어져 버릴 수 있다.

내 몸이 흩어져 부서지지 않고, 외부 힘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 미래를 꿈꿀 수 있음에 감사하다. 때가 좋은 시간과 공간에 태어나 감사하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이 불과 수십 년 전이다. 앞으로 내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는 아직 휴전 상태이며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억울한 죽음들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감각한 모든 시간 동안 내 육체는 온전해 왔다. 그래서 나는 착각을 한다. 내 육체는 앞으로도 온전하고 나의 세계는 침범 받지 않을 거라고.

목록

댓글